일제 억압과 수탈에 맞서 해녀들이 빗창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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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 섬 속의 섬, 우도의 역사문화 깃든 길
어족 자원·노동력 착취 등 맞서
여성이 주도해 항일운동 전개
우도·하도리 야학당 중심으로 
생존권 지키기 위해 거리에 나서
무차별적 폭압에도 굴하지 않아
‘해녀의 노래’ 한·눈물·삶 담겨
제주시 우도면 천진항에 세워진 우도해녀항일운동기념비.
제주시 우도면 천진항에 세워진 우도해녀항일운동기념비.

우도의 관문인 천진항 포구에 들어선 해녀항쟁기념비

우도 관문의 하나인 천진항에 내리면 우선 눈에 들어오는 것이 해녀항쟁기념비이다. ‘우도해녀항일운동기념비는 관이 아닌, 순전히 우도민에 의해 설립됐다. 기념비 뒤편에는 찬조자들의 명단과 금액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또 기념비 추진위원 명단도 각인돼 있는데 고문에는 당시 신철주 군수도 참여했다. 추진위원장에는 우도출신 신인홍 회장, 내용 고증은 김찬흡 선생이, 이러한 연유로 2020년에는 항일운동기념비 곁에는 김찬흡 선생 기념비도 설립됐다.

제주의 어촌 중 우도에 해녀항쟁상이 설치된 배경이 궁금하다. 일제 강점기 시절 제주산 전복은 일본뿐만 아니라 홍콩과 상하이 등지에서도 프랑스와 영국 등의 미식가들이 즐겨 찾는 메뉴였다. 감태는 요오드 채취와 공업용 아교 또는 화장품 원료로, 우뭇가사리로는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과자의 원료로 팔려 나갔다.

당시 제주의 해안가에는 일본인에 의한 통조림 공장이 성시를 이뤄 제주 해산물은 엄청난 경제적 가치가 있었다. 그럼에도 일제의 가혹한 수탈로 생산자인 해녀들의 삶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에 항거해 1932년 일어난 해녀항일운동은 세계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제주해녀들에 의한 정직한 저항운동이었다.

193217(구좌읍) 하도리 해녀 300여 명이 호미와 빗창을 들고 5일장이 서는 세화리 장터로 향했다. 인근의 해녀들도 시위대에 합류했고, 이를 구경하는 사람들의 수가 점점 불어나자 경찰도 어쩔 수 없을 지경이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수탈을 일삼던 일제는 해녀들이 채취한 전복이며 해산물을 그들이 지정한 사람에게만 판매하도록 했다. 악덕상인으로 악명을 떨친 니노미야라는 일본인이 해산물을 시세의 반도 되지 않는 헐값에 사들였다.

이에 해녀들은 제값을 쳐 달라고 요구했지만, 그렇다면 사지 않겠다고 오히려 으름장을 놓으며 전복의 매수를 거절하곤 했다.

이런 상황에서 해녀들은 해녀조합(당시 조합장은 일본인 도사(島司)였음)에 문제해결을 요구하는 사이 창고에 보관 중이던 전복이 썩어버리자 드디어 17일 시위를 감행한 것이다.

5일 후인 112일 다구치 데이키 제주도사 겸 제주해녀어업조합장이 세화리를 첫 순시하는 날을 기해 해녀들은 대대적인 연합시위를 벌이고 다구치 도사를 만나 담판을 짓자고 뜻을 모았다. 도사를 태운 차가 세화리 장터 근처를 지나가자 해녀들은 도사의 차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1000여 명의 해녀와 가세한 구경꾼들에 의해 포위돼 있던 도사가 차에서 내려 주재소 정문에서 다른 차를 타고 빠져나가려 하자 해녀들이 도사를 포위했다. 그러자 경관이 총 방아쇠를 당기고는 한 해녀의 목에 칼을 겨눴다. 그러한 긴장 속에서 칼끝에 목을 찔린 해녀가 입을 열었다.

우리들의 요구에 칼로 대하면, 우리는 죽음으로 대하겠다.”

해녀항일운동의 비밀 본거지. 강관순의 생가.
해녀항일운동의 비밀 본거지. 강관순의 생가.

바다 건너 항쟁에 달려간 우도해녀

바로 그때 바다를 건너간 우도해녀 300여 명과 시흥리(성산읍)의 해녀들이 만세를 외치며 합세했다. 이에 힘입어 주재소 안에 들어선 20명의 해녀대표가 다구치 도사와 협상하여 지정판매 절대 반대와 조합재정 공개 등 8개의 합의사항을 발표했다. 해녀들은 도사의 약속을 재차 확약받고 자진 해산했다. 그러나 도사는 형사들에게 해녀의 배후 관련자를 조사해 체포하도록 명했다. 해녀항일운동의 배후가 하도리 야학당과 우도 영명의숙의 청년교사들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경찰은 제주 전 지역에 비상경계령을 발표했다.

결국 세화리의 문도배와 김시곤, 종달리의 한양택과 한원택, 우도의 신재홍과 강관순, 하도리의 오문규 등 수십 명이 체포됐다.

그러나 그들을 호송하던 차를 1500여 명의 해녀들이 막아섰다. 돌과 빗창으로 자동차를 막아선 해녀들은 체포된 청년교사들을 탈출시키기에 이르렀다. 경찰에서는 무장경관대를 편성해 현장에 급파시키나 이웃 마을 해녀들도 속속 모여들어 세화리는 전시상태를 방불케했다.

이에 놀란 경찰은 해녀를 설득하는 척하면서 몰래 해녀들의 옷에 도장을 찍었다. 다음 날 옷에 도장이 찍힌 해녀 100여 명이 체포돼 세화 주재소 철창 안에 다시 수감됐다.

제주해녀항일운동을 이끈 애국지사들.
제주해녀항일운동을 이끈 애국지사들.

124일 호미와 빗창으로 무장한 500여 명의 해녀들이 세화리 경찰 주재소에 전날 수감된 100여 명의 해녀들을 탈출시키고 대신 주재소 급습작전을 지위한 부춘화 해녀 등 34명이 현장에서 체포돼 수감됐다.

126일 수감된 해녀들을 구출한 청년교사들과 해녀대표들이 우도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해 우도로 간 경찰에 의해 40여 명의 청년교사와 해녀대표들이 체포됐다. 이들을 구하기 위해 우도해녀 800여 명이 체포된 이들을 싣고 떠나려는 배에 달라붙어 경관의 옷자락을 잡고 늘어지자 경관들은 무차별 폭력을 가했다.

결국 배를 놓친 해녀들은 서둘러 풍선(風船)을 바다에 띄워 경찰의 배를 뒤쫓아 갔으나 역부족이었다. 당시 해녀들의 배는 엔진으로 가는 발동선이 아닌 바람으로 가는 풍선(風船)이었다.

당시 밤 학교인 야학에서의 훈학활동이 활발한 우도와 하도리의 공통점은 배움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지원이 있었던 마을이란 점이다. 11교제가 상징하듯 일제 강점기의 교육정책은 우민화 정책이었다. 이에 교육만이 구국의 길임을 마을공동체가 앞서 실천하려 하도는 1921, 우도는 1936년에 지역민들이 십시일반으로 지원금을 마련해 사립으로 초등학교를 설립한 대표적인 마을이었다.

해녀항일운동은 청년교사들이 주도하는 야학당을 중심으로 일어났고 야학당에서의 훈학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곳이 바로 우도와 하도리였다. 해녀항일운동에서 해녀의 대표였던 부춘화·김옥련·부덕량 등은 하도리 야학당 1회 졸업생으로서 문무현, 부대현, 김태륜 등 청년 지식인 교사들에게서 민족교육을 받았다. 강관순·신재홍·김성오는 우도의 영명의숙 교사였다.

결국 이들 모두에게 해녀항일운동의 배후세력·치안유지법 위반·가택침입·보안법 위반·협박·폭력행위 등으로 형이 언도되기도 했었다.

우도의 300여 명의 해녀들은 세화리 장터 시위에 참가하기 위해 5일간의 양식을 준비하고 호미와 빗창을 들고 10대의 풍선에 나눠 타 바다를 건넜다고 한다.

우도해녀항쟁기념비에는 1932년 해녀항일운동으로 잡혀간 우도의 선구자인 강관순이 작곡한 해녀가가 실려 있다. 우도출신 강관순은 감옥에서 해녀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기 위해 해녀가를 지어 면회 온 지인에게 몰래 전해주었다.

강관순이 작사하고 행진곡조로 불린 제주도해녀의 노래는 당시 우도를 비롯한 제주도 전역과 타지방에 출타한 해녀들에 의해서 널리 애창되기도 했다.

해녀항일운동의 비밀 본거지. 강관순의 생가.
해녀항일운동의 비밀 본거지. 강관순의 생가.

다음은 강관순이 지은 해녀의 노래 가사이다.

1=우리들은 제주도의 가엾은 해녀들/ 비참한 살림살이 세상이 알아/

추운 날 무더운 날 비가 오는 날에도/ 저 바다 물결 위에 시달리는 몸.//

2=아침 일찍 집을 떠나 황혼 되면 돌아와/ 어린 아이 젖먹이며 저녁밥 짓는다./

하루 종일 헤매었으나 버는 것은 기막혀/ 살자하니 한숨으로 잠 못 이룬다.//

3=이른 봄 고향 산천 부모 형제 이별코/ 일가족 생명줄을 등에다 지어/

파도 세고 무서운 저 바다를 건너서/ 각처 조선 대마도로 돈벌이 간다.//

4=배움 없는 우리 해녀 가는 곳마다/ 저놈들의 착취 기관 설비해 놓고/

우리들의 피와 땀을 착취하는다/ 가엾은 우리 해녀 어디로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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