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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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TV에서 효자가 등장하는 프로를 보았다. 사흘을 추적이는 겨울비에 스산하던 참이었다. ‘계룡산에 울려 퍼지는 효심, 치매 노모를 보살피는 백발 아들’, 화소가 마음을 붙잡아 속으로 침몰했다. ‘저런 효자도 있구나.’ 황당한 허구보다 가슴 치는 사실에 끌려들었다.

머리 허연 63세 아들이 처자를 서울에 두고 계룡산에 내려와 어머니 집에서 노모를 모시며 효도하는 사연. 어머니를 섬기는 언행이 하도 절실해 정신줄을 끌어당기는 게 아닌가. 그의 효행은 상상을 넘는 것이었다. 거동은커녕 혼자 앉지도 못하는 어른을 안고 업고 온갖 짓과 말로 어르며 치매를 치유하려 안간힘을 쓴다.

어머니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이마를 맞대, 잃어버린 옛 기억을 되찾게 하려 애쓰는 모습이 애처롭다. 처음부터 꺼내든 게 아들이 어머니에게 보여드릴 수 있는 밝고 따뜻한 웃음이었다. 아들이 생글생글 웃으면 치매가 훔쳐버린 어머니의 기억을 조금씩 되찾아 갈 거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 같다.

어느 날, 그 아들은 어머니를 차 앞 좌석에 나란히 태우고 몇백 년 된 노송을 찾는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하늘을 향해 뻗어 올린 가지와 잎으로 무성하다. 아들이 소나무를 찾아온 뜻을 어머니가 어찌 알랴. 늙은 나무가 하늘 아래 청청한 모습인 걸 그대로 보여드리고 싶었을 것이다. 어머니에게 나무의 짙푸른 빛을 보여주고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게 한다. 당장에 어머니가 무표정해도 상관없다.

어머니가 다니던 산문을 찾아 대웅전에서 주지 스님과 해후한다. 얼굴을 덮었던 마스크를 내리고 하얗게 웃으며 두 사람을 반갑게 맞이하는 스님도 한눈에 그 아들의 깊은 의도를 헤아렸을 것 아닌가. 말이 없을 뿐 어머니도 무심치 않았을 것이며….

산속엔 겨우내 눈이 내려 덮였지만, 아들의 가는 길을 막지 못한다. 마당이 너른 익숙한 집을 찾는다. 평소 만남의 장소가 돼 주는 넉넉한 공간이다. 주인의 도움을 받아 건물 안의 한쪽 벽면 앞에 천을 깔고 의자를 갖다 놓은 뒤, 음악을 틀어놓는 게 아닌가. 요즘 젊은이들이 즐겨 듣는 LP 판, 80연대 복고풍의 선율인가. 옛 노래가 노모를 편안하게 해줄 것 같았다.

늘 하듯 그렇게 아들은 두 손으로 노모의 얼굴을 감싸 말을 건네기 시작한다. “어머니가 이렇게 제 옆에 계셔 주는 것만으로도 저는 너무나 감사해요. 저는 지금이 참 행복합니다. 오래, 오래 사셔야 해요, 어머니.”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이적(異蹟)이었다. 어머니와 이마를 맞대고 끊임없이 얘기하는 아들의 귀밑을 어루만지는 어머니의 떨리는 손. 아들이 놀라서 눈을 번쩍 뜬다. 입가에 퍼져 있는 얇은 웃음. 순간순간 흐렸던 어머니의 의식이 깨어나고 있다. 한 가닥 빛이 스며들어 어둡던 눈이 생광(生光)하는 게 분명했다.

이 시대 마지막 효자의 효심에 하늘도 감응한 것인가. 그 어머니 젊은 시절 아들에게 정성껏 끓여주던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온 집 안에 퍼지던 어머니의 냄새. 어느새 상상이 자주 지나던 잔잔한 연못가에 가 있다. 파란 창포와 부들이 빼곡히 들어선 물 위에 소금쟁이 한 마리 걸리적거리다 빠져나와, 신나게 물살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간다. 갈색 무늬에 은빛 잔털이 유난히 눈길을 끄는 녀석이 달달한 냄새를 풍긴다. 계룡산 효자가 어머니를 깊숙이 품는다. 모자간 영혼이 서로에게 번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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