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스토리를 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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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섬 속의 섬, 우도의 역사문화 깃든 길
주민들 학교 설립 위해 적극 나서
지역사회 교육환경 조성 본보기
강관순, 문맹퇴치·민중계몽 주도
제주해녀항일활동 배후서 지도
김찬흡, 우도 역사·문화 진흥 앞장
제주시 우도면 천진항에 세워진 남헌 김찬흡 기념비.
제주시 우도면 천진항에 세워진 남헌 김찬흡 기념비.

연평고등공민학교 그리고 우도초·중학교로의 통합 과정

1915년 개교한 영명의숙(마을 공동으로 세운 사립 개량서당)을 모태로 하는 우도초등학교는 1938년 사립연평심상소학교의 설립으로 근·현대 학교로의 기반을 다졌다.

또 해방과 더불어 사립에서 연평공립국민학교로의 학교체제를 확실히 다지게 됐다. 광복 후 우도는 매해 80여 명의 초등학교 졸업생들을 배출하지만 대부분의 졸업생들은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우도에서는 사립으로 1949년 연평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해 중등교육에 대한 바람을 일부 만족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고등공민학교는 특별학제의 하나로 정규 학교교육기관은 아니었다. 중학원이 아닌 정상적인 중학교 설립을 위해 우도선인들은 적극 나섰는데 특히 고태주 등이 중학교 설립기성회를 조직함으로써 본격화됐다.

 

전국적으로도 학교 전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우도초·중학교.
전국적으로도 학교 전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우도초·중학교.

설립기성회에서는 학교부지 마련을 위해 출향민들을 비롯한 재일교포 등을 찾아다니며 도움을 호소했다.

이에 마을지주들의 후원 재일향민들의 성금 등으로 중학교 설립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을 주민들은 자재들을 운반하는 일, 등짐으로 돌을 운반하고 울타리를 만들며 운동장을 고르는 일 등에 적극 나섰다.

한편 우도 주민들은 증축기성회도 조직하여 자금을 지원했는데 이러한 예는 지역사회가 교육환경을 어떻게 조성해야 하는지에 대한 좋은 사례로 전해지고 있다.

1949년 사립으로 개설한 연평고등공민학교를 모태로 하는 우도중학교는 19546월 연평중학교란 이름으로 정식으로 개교했다.

이후 산업화의 영향으로 도서벽지의 사람들이 도시로 빠져나감에 따라 학생 수가 줄어들고 2000년 연평초등학교와 연평중학교는 통합되어 연평초·중학교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오다가 2010년에는 연평초·중학교는 우도초·중학교로 명칭 변경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강관순(康寬順·1920~1942·사진 아래 맨 왼쪽).
강관순(康寬順·1920~1942·사진 아래 맨 왼쪽).

우도출신 항일운동가 강관순과 제주해녀의 노래

우도에서 태어난 항일운동가 강관순은 1931년 사회주의 항일단체인 혁우동맹을 결성해 제주해녀항일 활동을 배후에서 지도했다.

일경에 의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된 그는 1933년 징역 26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러야 했다. 그 후유증으로 강관순은 1942년 봄 함북 청진에서 병사했다.

그러자 부인 김유생(金有生)이 만삭의 몸으로 남편의 시신을 고향으로 옮겨 안장했다. 부인은 그 후 유복녀(현재 우도에 거주)와 함께 우도에서 고인의 유지를 지키며 살았다.

정부는 20053·1절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우도의 사립 영명(永明)의숙(4년제)을 졸업한 강관순은 1924년 제주 유일의 고등학교인 제주공립농업학교(현 제주고 전신)를 졸업(14)한 후 모교 영명의숙의 교사로 재직하면서 계몽극을 지어 공연하기도 했다. 또한 조선일보 기자로도 활동한 그는 야학을 통해 부녀자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면서 문맹퇴치와 민중계몽 운동을 주도했다.

당시 우도의 3대 천재로 불린 영명의숙 교사들인 강관순·신재홍·김성오는 문화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는 한편 야학을 열어 해녀들에게도 훈학을 했다. 특히 1932년 해녀항쟁 중 일제에 의해 검거될 당시 강관순은 옥중에서 해녀의 노래’ 4절까지 지었다.

마침 강관순과 함께 수감된 남편을 면회하러 온 오문규의 부인(홍무형)을 통해 동지들에게 전해진 것을 당시 도쿄東京 행진곡의 곡조에 붙여 부르게 되면서 전도에 파급된 노래가 제주해녀의 노래이다.

이 노래는 출가 해녀에 의해 한반도와 일본·중국까지 불렸다 한다. 일제에 의해 금지된 이후 해녀들로부터 잊히어갔던 해녀의 노래는 우도중학교 교장이던 남헌 김찬흡 선생에 의해 되살아 날 수 있었다.

우도의 역사문화를 되살린 남헌 김찬흡

8경이란 어느 지역의 여덟 가지 아름다운 경치를 뜻한다. 중국의 소상팔경에서 유래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관동팔경단양팔경 등이 있다.

1982년 우도중학교의 교장으로 부임한 김찬흡 선생은 우도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고자 우도의 지명과 경관에 대한 자문과 자료를 수집해 우도8경을 선정했다.

우도8경 등을 통해 우도를 널리 알리는데 크게 기여한 김찬흡 선생은 지난해 9월 영면에 드셨다. 우도면민들은 선생의 살아생전인 202012월 선생의 공덕비를 천진항 선착장 해녀항쟁탑곁에 세우기도 했다. 관이 아닌 우도면민이 세운 해녀항쟁탑 건립에도 고인이 깊이 관여했기 때문이다. 당시 연평중학교 교장이었던 고인은 1932년 해녀항쟁 시 우도해녀의 역할에 대한 역사적 자료들을 제공해 우도면민의 자긍심을 고취하는데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호가 남헌인 김찬흡 선생의 우도사랑 공덕은 제주향토사와 우도교육에 대한 기여, 우도팔경의 선정과 우도 홍보, 교지(校地) 확보문제, 우도해녀의 항일정신 포양 등으로 요약된다.

또 선생은 우도해녀항일운동기념비(1995)의 내용을 고증했고 해녀항일운동의 비밀본거지 중 하나인 강관순의 생가 기념비(2005), 우도의 개척자이자 훈학자인 김석린 진사의 집터와 진사통 유래비(2005)를 지었다. 이와 함께 관련 비 등을 세우는 일을 주선했다.

특히 선생은 우도출신 항일운동가 강관순(1909~1942)이 지은 해녀의 노래가사를 일본에서 발간된 濟州島歷史誌(제주도역사지 1986)’에서 발굴해 다시 불리게 했다. 202012월 우도면민이 세운 남헌 김찬흡 선생 기념비에서 선생이 우도에 기여한 바를 일부 옮긴다.

남헌 김찬흡 선생님께서는 1955년 교직을 시작한 이후 퇴임하실 때까지 열과 성을 다하여 제주교육에 이바지 하였을 뿐만 아니라 평생을 제주 향토사 발굴과 기록 그리고 출판하여 널리 알리는 일에 헌신하셨습니다. (중략)또한 전임 현경원 교장선생님이 구입하여 조성한 운동장 개인부지를 가족분들을 설득하여 학교부지로 기증토록 하셨습니다. 특히 일제의 탄압에 맞서 일어난 제주해녀항쟁 과정에서 불리어졌던 우도출신 강관순 님이 작사한 해녀의 노래1986년 일본에서 발간한 濟州島歷史誌에서 발굴하여 기사화함을 계기로 우도해녀들의 항일정신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크나큰 남헌 김찬흡 선생의 우도사랑 공덕을 오래 기억하고 기리고자 우도면민이 뜻을 모은 기념비를 우도에 세웁니다. 서기 202012월 우도면민 일동

다음은 은사인 고인의 영향으로 우도에 여러 번 의료 봉사에 임했던 김순택(전 세종의원 원장)님이 지은 고인에 대한 추모 시의 한 귀결이다.

精通學問長於人(정통학문장어인) 학문이 정박하셔 인물사에 뛰어났음이라./

彛倫立正成名者(이륜립정성명자) 사람의 도리와 명성을 바르게 알리려 하셨으니

海島之師仰奉諲(해도지사앙봉인) 누구인들 제주의 스승으로 받들어 섬겼네. /

不得嗟哉傳績業(부득차재전적업) 안타깝다, 공업을 못 다 이뤄 전할 수 없음이여,

南軒逝去碧東湮(남헌서거벽동인) 남헌선생이 서거하니, 도서관 하나 사라졌네.

지난해 9월에 서거한 남헌 김찬흡 선생은 특히 탐라국 이후 지금까지의 방대한 제주역사문화에 관련한 내용들을 담고 있는 제주향토문화 대사전(2014)’과 자매편인 제주인물 대사전(2016)’을 또한 남기셨으니 그 공적과 위업은 두고두고 활용되고 회자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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