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겁의 세월이 빚어낸 풍광, 걸작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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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섬 속의 섬, 우도의 역사문화 깃든 길
투박한 제주선인 닮은 방사탑
어민 안녕 빌고 등대 등 역할
곳곳에 펼쳐진 천혜의 절경들
시인들의 시비 아름다움 더해
고이삼씨 등 고향 빛낸 인물들
해안절벽과 함께 설화를 품고 있는 우도 돌칸이. 이곳은 우도의 대표적인 해안 절경 중 한 곳이다.
해안절벽과 함께 설화를 품고 있는 우도 돌칸이. 이곳은 우도의 대표적인 해안 절경 중 한 곳이다.

 

제주도 유일의 사다리꼴 영일동 할망하르방 방사탑

우도에는 국가지정문화재인 홍조단괴가 서빈백사 지경에 형성돼 있다. 이밖에도 문화재로 지정될 만한 유물들이 산재해 있는데 환해장성과 연대 그리고 방사탑 등이 대표적이다.

우도에는 설촌과 더불어 어부와 해녀들의 무사안녕을 염원하기 위해 세워진 해신당과 포제단 그리고 방사탑 등이 도처에 흩어져 있다.

 

방사탑들은 주로 바닷가에 위치해 있다. 잡석을 이용해 허튼층쌓기를 했고 속은 잡석으로 채워졌다. 특히 영일동 할망하르방 방사탑은 제주도 방사탑 중 유일한 사다리꼴로, 평면사각과 정면 사다리꼴을 이루고 있어 듬직한 균형미가 돋보인다. 더욱이 이 탑은 도대불(등대) 역할도 했다. 마을에서 보아 바깥쪽에 해당하는 해변에는 시체들이 떠올라 옴에 따라 이를 예방하기 위한 것으로도 보인다.

이런 기능은 여느 방사탑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바닷가에 산재한 현무암 자연석을 거칠게 다듬어서 사용한 방사탑은 보존이 잘 된 편이다. 우도의 방사탑들은 그 수도 적지 않을뿐더러 그동안 변형되지 않은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투박하고 오래된 모습이 제주선인들의 얼룩진 역사를 닮았다.

우도의 특이한 지명과 시비

우도는 제주본토에서 바라볼 때 소를 닮은 데서 비롯되어진 지명으로 제주어

로는 소섬또는 쇠섬으로도 불린다. 이렇듯 역사와 환경을 반영한 지명이 우도에 더러 있는데 드렁코지와 돌칸이, 검멀레와 비와사폭포 등이 그것이다. 또한 우도 도처에는 시인들의 시비도 있어 우도의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드렁코지=종달리 바닷가 만세코지와 우도 드렁코지 사이의 거리는 대략 3이다.

오래전부터 본도의 사람들은 테우인 떼배를 타고 이곳을 통해 처음 우도에 들어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697년 유한명 목사가 말 150필을 우도에 방목한 이후 국유목장인 우도에 있는 말들을 사육하기 위해 목자인 말테우리들이 이곳을 통하여 왕래했다.

하지만 그 이전부터 해산물을 채취하기 위해 제주본토의 사람들이 이곳으로 우도에 상륙하였으리라 여겨진다. 제주어인 코지는 코같이 돌출되어 바다 쪽으로 뻗은 곶을 지칭하는 말이다. 밀물 떼에도 물속에 잠기지 않지만 물이 빠지면 여와 연결되는 곳이 코지이다.

이곳 코지는 물살이 다른 곳보다 센 편이다. 제주어로 물들어야 보말을 잡주라는 말처럼, 드엉코지라는 지명은 들어오고 나가는 장소의 의미를 지닌 순수 제주어라 더욱 친근하게 들린다.

우도에서는 설화 속에 등장하는 사람이름을 붙인 득셍이코지, 길쭉한 진코지, 소의 머리뼈가 튀어나온 것 같은 광대코지, 졸락코지 등이 있다. 우도에서는 또한 코지 대신에 봉오지라고도 부르는데, 시신과 관련한 영장봉오지, 쟁기의 보습을 닮은 보섭봉오지 등이 있다.

톨칸이=톨칸이는 소의 여물통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는 우도지역어로 촐까니라고도 불린다. ‘건초를 뜻하는 제주어로 소나 말의 양식인 꼴이다. 우도에서는 소나 말의 먹이를 담는 그릇을 까니라 불렀다고 한다. 우도는 소가 누워있는 모습을 닮은 섬이기에, 앞쪽인 우두봉은 소의 머리, 후해석벽 쪽의 기암절벽은 소의 광대뼈 형상을 하고 있어 이곳을 광대코지라 부르기도 한다. 제주설화에 의하면 성산읍 오조리 바닷가에 위치한 식산봉은 촐눌(건초)을 쌓은 더미라고 한다. 그래서 한자로 食産봉이라 적는다. 촐눌과 소 사이에는 소먹이통이 필요한 데, 바로 이곳이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지역이라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 촐까니혹은 톨칸이이다. 촐까니가 와전돼 톨칸이로 정착된 듯하다. 먹돌해안인 이곳을 소에게 먹이를 담아준 여물통의 의미를 담은 톨칸이라고 이름을 지은 데서 보듯 우도선인들 역시 상상력을 발휘해 어려움을 승화하려 했을 것이다. 이렇듯 경승지인 이곳은 해안절벽과 함께 설화를 품은 비경이기도 하다.

비와사폭포=우도 톨칸이 해안절벽 근처에는 특이한 지형들이 발달했다. 검은 현무암 바위덩어리들은 용이 승천하는 형상과 사자가 포효하는 형상 등 다양한 자연 예술을 보여주기도 한다. 또한 비가 많이 내리는 날에는 우도봉 일대에 내린 빗물이 낮은 지형을 따라 이곳 절벽으로 내려와 폭포수가 되어 바다로 떨어지기도 한다. 우도선인들은 비가 오면 폭포수가 되어 내리기도 하는 이곳을 비와사폭포라 이름 지었다.

검멀레=검멀레라는 말은 우도의 상징인 소머리오름 북쪽 동안경굴 해변에 있는 검은 모래 지경을 지칭하는 지역어이다. 우도 관광의 1번지라 할 수 있는 이곳은 관광객들로 늘 붐빈다.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 검멀레해변을 거닐고, 우도봉 절벽으로 이어진 굴 문을 지나 다시 작은 굴로 들어가면 고래전설의 신비로움을 간직한 동안경굴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서 매년 가을에 우도동굴음악회가 열린다.

시비(詩碑)=우도를 사랑하는 시인들에 의해 쓰인 시를, 비에 새겨 세워진 시비들을 도처에서 만난다.

우도를 빛낸 사람들

1905년에는 조정에서 우도 출신 고달인(高達仁)에게 효자 완문(完文)과 전령(傳令)이 내려졌는데, 효자비는 김진사 훈학터 근방인 돈동산에 세워져 있다. 이로 미루어 우도에는 타지보다 높은 수준의 훈학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한국인들의 지원을 받아 19345월 오사카에 비밀리에 설립된 성심야학교의 건립자 이봉춘(李奉春·가명 임국삼) 선생은 우도 출신이다.

1913년에 태어난 이봉춘은 15살인 1928년 일본으로 건너가서 노동일에 전전하다 용진회라는 비밀결사대를 조직 선도했으며 1934년 항일운동의 저력자 강임양·현천봉·이권민 등과 어울려 무산자 청소년들을 계몽하기 위해 야학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오사카 개인집에서 성심야학을 개설하고, 민족의식이 강한 교사들을 물색해 김주삼(조천김성종(평대) 등의 교사들을 초빙, 청소년들에게 조선의 실상을 알리고, 민족의식을 양양시켜며, 궁극적으로는 조선의 독립을 쟁취하는 것이 성심야학교의 목표임을 강조했다. 그 후 이들은 194211월 검거될 때까지 11개 지역을 이동하며 20~30명의 청소년들을 모아놓고 일본어와 산수를 가르치는 한편 비밀리에 조선 독립 창가를 지어 부르게 하고 한국 역사·지리·한글을 가르치는 등 민족의식을 배양하는 교육을 했다. 이봉춘은 1943년 오사카 지방재판소에서 징역 4년 옥고 중 해방을 맞았다.

우도 출신인 고이삼(高二三)은 일본의 도서출판 신간사 대표로, 도내 일간지에 사삼을 말한다를 일본에 처음 번역 소개했다.

재동경 탐라연구회 회장을 역임했고, 1991년 제주도문화상 수상, 출판사 신간사도 ‘4·3 모임과 마찬가지로 올해 31년째를 맞았다. 지금까지 200여 권의 책을 펴냈는데, 그중 절반 이상이 재일코리안 관련 서적이며 제주 4·3사건 관련 책도 50권 가까이 된다.

지난해에는 신간사 설립 30주년을 맞아 구일본군 조선반도 출신 군인·군속 사망자명부를 냈다. 1400쪽이나 되는 방대한 내용이라 가격도 고가의 책이지만 자신의 출판사밖에 낼 곳이 없다고 판단했다. 고 대표는 이런 노고를 인정받아 제주 4·3 평화재단이 2018년 처음 제정한 ‘4·3 특별공로상, 국외활동 부문 수상자로 선정됐다.

3년 전 생활을 위해 운영하던 한식당을 접었다는 고 대표는 너무 힘들어서 출판사를 그만두려고 할 때마다 그의 아내가 식당은 당신이 없어도 누군가 하겠지만 출판사는 당신이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했다 전한다.

 

지금까지 섬 속의 섬, 우도에 대한 다양한 소개를 하면서 긴 여정을 마쳤고 이어서 탐라·동도·정의현 역사문화 깃든 길을 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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