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국부터 이어진 제주인의 삶 오롯이 녹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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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 탐라·동도·정의현 역사문화 깃든 길
고·양·부 삼을라 개국신화 중심
성산포, 삼별초 흔적 남아 있어
몽고 지배 때부터 융성한 말목장
왜구 침략 막기 위한 시설 곳곳에
4ㆍ3 아픔 너머 있는 역사문화 숲

탐라·동도·정의현의 역사문화 깃든 길을 열며

섬 속의 섬 소섬(우도)의 도처를 거닐고는 이제, 바다 건너 성산포로 오른다. 영주십경 중 제1경인 일출봉이 가까이에서 반긴다.

오래전 중국에서 제주를 칭한 명칭 중 하나는 동영주였다. 5000년 전 바다에서 솟아올랐다는 성산일출봉은 어쩌면 탐라국의 시원(始原)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단기보다 4년이 앞선 어느 날, 모흥혈(삼성혈)에서 태어난 고··부 삼을나가 열운이 연혼포에서 벽랑국 삼공주를 만나 초야를 치른 곳은 지금의 서귀포시 성산읍 온평리에 있는 신방굴이기에 하는 말이다.

이를 뒷받침하듯 삼을나와 삼공주 후예들의 삶의 흔적들이 정의현 도처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곳으로는 온평리 동굴 유적을 비롯해 신산리 고인돌·수산2리의 한못궤유적과 벌라리왓유적·성읍리 유물산포지 등이다.

우도와 성산포는 옛 동도현과 정의현에 속했다. 고려시대에는 17현의 주현인 대촌(제주시) 동쪽을 동도(東道), 서쪽을 서도(西道)라 칭했다.

지금의 성산읍·표선면·남원읍 그리고 옛 서귀읍 일대가 동도에, 중문동·안덕면·대정읍 일대가 서도에 속했다. 반면 조선시대에서는 제주목을 중심으로 하여 산남 동쪽을 정의현, 서쪽을 대정현이라 했다. 정의현에는 토산현·호아현·홍로현이, 대정현에는 예래현·차귀현이 속했다.

시기에 따라 조금의 차이는 있겠지만 동쪽으로 종달리에서부터 서귀포시 법환동, 북쪽으로 성산읍 수산리, 남쪽으로 남원읍 수망리 및 호근동을 잇는 지역이 정의현에 해당된다.

1416년 제주목·정의현·대정현인 3읍체제로 나눠진 후 정의현은 현청 소재지가 바다 가까이 한쪽으로 치우친 지금의 성산읍 고성(古城)리에 위치했던 이유로 1423년 당시 마을명이 진사리인 성읍으로 현청 소재지를 옮겼다.

그러니 올해는 현청이 성읍리로 옮겨간 지 6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이다. 이러한 역사적 흐름을 반영하여 앞으로 연재될 질토래비 여정의 이름을 탐라·동도·정의현의 역사문화 깃든 길이라 칭해본다.

또 이번 여정에서는 지역의 역사문화와 더불어 탐라와 제주 사이의 역사문화의 주요 흐름도 같이 기록하려 한다.

 

탐라·제주·정의현의 역사문화 숲에는

해양왕국인 탐라는 항해술과 조선술이 발달하여 고구려·백제·신라는 물론 일본·중국 등과 통상과 교류를 넓혀나가기도 했다.

그러다 660년 백제가, 668년 고구려가, 10세기 전기 후삼국이 멸망하고 그리고 14세기 말 조선이 들어서는 과정에서 시기와 나라를 달리한 왕족과 유민들이 탐라·제주로 들어오기도 이주민(移住民)들이 가져온 문물과 함께 원주민(原住民)들은 수준 높은 문화를 다져나가기도 했을 것이다.

성산포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김통정 장군이 이끄는 삼별초가 1270년 입도하여 항파두리 성을 쌓아 고려와 몽고에 항전하다 패한 후, 원나라는 탐라를 유형지로 하여 왕족·관리·승려·도적·죄수 등을 보냈다.

또한 몽고는 말들을 방목하려 원시림 지역을 불태워 목초지로 조성하고 그들의 근거지로 동아막과 서아막(한경면 고산리 일대)을 두기도 했다. 지금의 성산읍 수산리 일대에 들어선 (동아막의) 탐라목장에서 자란 말들은 일출봉 밑의 수마포와 서귀포 그리고 당포(唐浦·서난드르) 등지를 통해 몽고 등지로 실려 나갔을 것이다.

1374년 최영 장군 부대에 의해 제주가 몽고의 지배에서 벗어난 다음 해인 1375년 차현유의 난이 말과 관련해 일어난다. 말의 고장으로는 3읍 중 정의현이 으뜸이다. 그래서인가 남원읍 의귀리는 헌마공신 김만일이란 큰 인물을 낳기도 했다.

1376년에는 100여 척으로 제주연안을 침범한 왜구들이 노략질하자, 1년 전의 차현유난을 진압한 성주 고신걸과 왕자 문신보가 또한 왜구를 물리치기도 했다. 이후에도 왜구는 수시로 제주연안에 침투하여 노략질을 일삼곤 했다. 대표적으로는 을묘왜변 제주승첩’ 3년 전인 1552년에 일어난 정의현 천미포 왜변이 있다.

왜구방어를 위해 쌓은 925봉수 38연대 중 대부분의 원형이 사라진 반면, 수산진성·토산봉수·독자봉수·협자연대·소마로연대 등 원형으로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이 옛 정의현이기도 하다.

고려사(문종12·1058)의 한 대목이다. ‘탐라는 지질이 척박하고 백성이 가난하여 해산물 채취와 배 타는 것으로 생계를 도모한다(耽羅地瘠民貧 惟以海産 乘木道經紀謀生).’

이로 보아 당시 선인들의 주업은 농사보다 해산물 채취였을 것이다. 이후 원의 지배기를 거치며 목마 역시 이 땅의 기간산업으로 부상했을 것이라 추측된다.

1380년 이후 중국 운남성을 다스리던 원나라 양왕의 후손인 왕족과 유민들이 탐라로 이주해 옴에 따라 원의 상류사회인들이 탐라에 영주하게 되고 그들의 문화와 풍습이 이곳의 문물과 융합·동화되기도 했을 것이다.

1392년 조선개국 후 고려 충신 한천(청주한씨 입도조)은 불사이군으로 이성계에 의해 제주에 유배되고, 그는 가족과 함께 정의현 가스롬(가시리)에 정착하여 훈학활동을 펼쳐 제주의 4현으로 추앙받기도 했다.

원 지배기를 거치며 말 교역을 경제기반으로 삼았던 여말선초(麗末鮮初)의 제주선인들은 중앙정부에 의해 말 교역이 통제당하자 또 다른 삶의 활로를 찾아 바다로 진출한다. 역사서에서는 이들을 포작인또는 무두악이라 부른다.

중앙통제가 얼마나 심했기에 고립무원이 되어버린 원악도 제주 섬을 탈출했을까. 1629년부터 1823년 사이 내려진 출륙금지령으로 탐라국 이래 발달해온 조선술은 사라지고 테우만이 제주 연안을 떠다니곤 했다.

올해는 1862년의 강제검 난과 1898년의 방성칠 난에 이어, 신축민란(항쟁, 이재수 난)이 일어난 지 122주년이 되는 해이다. 1901년 정의현의 여러 마을들을 휩쓸 듯 지나간 민란(항쟁) 동군의 장두는 강우백이다.

이와 함께 성산면 시흥리를 비롯하여 구좌면 하도리와 우도 중심으로 1932년의 해녀 항일운동이 일어난 지 91주년을 맞는 해이다. 그리고 4·3이 일어난 지 75주년이 되는 해이다.

표선면 가시리는 4·3의 희생자가 많기로는 제주도의 세 번째 마을이다. 이렇듯 4·3의 아픔 너머에 있는 여러 역사문화와 공감하고 아픔들을 보듬으려 할 때 우리는 더욱 울창한 제주의 역사문화 숲을 가꿀 수 있을 것이다.

문화를 가꾸는 힘은 정체성을 바르게 세우려는 간절함이고 정성이다. 선인들의 삶에서 교훈과 지혜를 터득할 교육의 장은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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