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상생의 사시복지 시작…‘신화의 터전’ 온평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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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 탐라·동도·정의현 역사문화 깃든 길

고·양·부 삼을나, 사시복지로 
땅 나누며 수눌음 정신 전해
삼공주와 혼인한 마을인 온평리
삼별초 입도 시 쌓은 환해장성과
탐라국 개국 관련 유물·유적 산재
삼을나가 벽랑국 삼공주를 맞이해 결혼한 서귀포시 성산읍 온평리 혼인지.
삼을나가 벽랑국 삼공주를 맞이해 결혼한 서귀포시 성산읍 온평리 혼인지.

▲삼성신화(三姓神話)와 사시복지(射矢卜地) 엿보기

탐라의 개벽신화에는 선인들의 바람과 함께 교훈도 녹아 있다. 모흥혈에서 솟아나 한라산에서 사냥을 하던 삼을나는 신비로운 목함이 동해로 떠오는 것을 보고 온평리 바닷가로 줄달음친다. 그리고 배에서 내린 벽랑국(碧浪國) 삼공주를 맞아, 혼인지에서 목욕재계한 후 신방굴에서 초야를 치른다. 이어 한라산 중턱의 물장오리 위쪽에 위치한 살손장오리(射矢長兀岳)에서 화살을 날려 거주할 곳인 1도·2도·3도를 정한다. 제주에서는 오래전부터 이를 사시복지(射矢卜地)라 칭하는데, 사시복지는 투쟁이 아닌 상생을 뜻하는 제주문화의 키워드이다. 

사시복지로 살 땅을 정한 삼을나와 삼공주는 오곡의 씨앗을 뿌려 가꾸고 소와 말을 기르며 삶을 이어간다. 삼을나는 최초의 탐라인이고 삼공주는 최초의 외국인이다. 이는 곧 다문화 사회를 구현하려는 신화의 상징이자 교훈이다. 삼을나가 살 땅을 정하려 살손장오리에서 표적으로 맞힌 돌이 삼사석(三射石)이다. 

1736년 삼천서당을 설립한 노봉 김정 목사는 삼성신화(三姓神話)를 듣고 관련 유물유적을 살핀 후 삼사석비(제주도기념물)를 세운다. 비문에는 ‘옛날 모흥혈에서 활을 쏘아 맞은 돌이 남아 있으니, 신인들의 기이한 자취는 천추에 비추리라.’라고 적혀 있다. 

삼성신화를 다룬 영주지·고려사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는 삼신인의 거주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없는 반면, 1450년 영곡 고득종이 지은 탐라고씨족보 서세문 등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고을나 사는 곳은 한라산 북쪽 1도리로 제주땅이고, 양을나 사는 곳은 2도로 한라산 남쪽 산방리로 대정땅이고, 부을나 사는 곳은 3도로 한라산 남쪽 왼편 토산리로 정의땅이다.’ 그래서인지 제주부씨 집성촌은 정의현 일대에 많은 편이다. 대정현 지경인 화순리에는 양왕자터도 있다. 

제주에서는 외지에서 온 사람들을 경계하는 투로 ‘육짓거’라 칭하곤 한다. 이는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에 의한 착취와, 4·3 당시 서북청년단의 만행 등에서 비롯된 듯하다. 이렇듯 제주는 외침과 수탈을 수없이 당하면서도 삶을 개척해온 저항과 끈기의 섬이었으며, 자연재해를 극복하며 억척스럽게 살아온 슬픈 변방이었다. 

탐라선인들이 지은 개벽신화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과 상징을 생각한다. 치열한 다툼이 아닌 상생의 삶을, 그리고 예로부터 내려온 정신을 찾아내라 함은 아닐까. 탐라에서 제주로 이어온 정신은 곧 나와 다름을 인정하는 포용성이고, 삼다삼무의 정신을 잇는 수눌음이고, 바다로 세계로 나아가려는 도전 정신이리라.

혼인지 삼공주추달비(三公主追達碑).
혼인지 삼공주추달비(三公主追達碑).

▲탐라국과 벽랑국을 이어준 혼인지 마을 온평리

성산읍 온평리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탐라국 때부터일 것이다. 온평리 혼인지 일대에서는 신석기 시대와 탐라 전기의 토기들이 일부 출토되기도 했다. 탐라순력도(1702) 한라장촉을 비롯해 탐라지도(1709) 등에는 온평리를 영혼포(迎婚浦), 탐라지초본(1843) 등에는 연혼포(延婚浦) 또는 영혼촌(迎婚村)으로 기록돼 있다. 이에서 보듯 온평리의 옛 이름들은 삼을나가 벽랑국 삼공주를 맞이해 결혼한 마을의 의미를 담고 있다. 

향토연구가인 오창명 박사는 ‘제주도 마을 이름의 종합적 연구(2007)’에서 온평리의 옛 이름인 열운이를 ‘연 곳, 맺은 곳, 결혼한 곳’이라는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그런 연장선에서 온평리는 혼례를 올린 마을의 의미를 담은 ‘예혼리’라 불리기도 했다. 

신방굴.
신방굴.

▲온평리에 산재한 개벽신화 관련 유물유적

탐라국 개국과 관련해 온평리에는 여러 유물·유적이 산재하고 있다. 삼을나가 벽랑국 세 공주를 색시로 맞이한 연혼포, 목욕재계한 혼인지, 초야를 치른 신방굴, 옛 문헌에 등장하는 삼을나에 관한 글이 새겨진 표석 등이 그것이다. 한편 삼공주가 입도한 날 황금빛 노을이 비친 온평리 바닷가를 ‘황노알’ 또는 ‘황날’이라 부른다.

이곳에는 세 공주가 육지로 올라올 때 디뎠다는 디딤팡 돌도, 말들이 올라온 발굽 자국도 남아 있다. 또한 삼공주를 태운 함선을 보고 삼을나가 쾌성을 질렀다고 해 온평리 바닷가 동남쪽 포구 일대를 ‘쾌성개’라 부른다. 혼인지 북쪽에는 고인돌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괸돌(고인돌)’이라 불리는 지명도 있다. 온평리 바닷가인 황노알 지경에서는 1974년 돌칼·돌도끼·기와 파편 등이 발견됐으며, 이후에도 혼인지 굴과 서근궤와 열운이 등지에서도 유물 파편들이 발견됐다. 이러한 여러 유산으로 미루어 온평리에는 석기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했으리라 여겨진다. 

▲삼별초 입도 시 쌓은 온평리 환해장성(環海長城)

환해장성은 고려시대부터 외부의 침입 등을 방어하기 위해 제주도 바닷가를 둘러쌓은 돌담으로, 조선시대에도 거듭해 쌓아졌다. 제주도 전역에 남아 있는 15여 곳의 환해장성 성담들은 1998년 제주특별자치도의 기념물 제49호로 지정됐다. 현재 환해장성을 확인할 수 있는 곳으로는 온평리를 비롯해 신산·태흥·일과·애월·고내·화북·삼양·북촌·동복·함덕·행원·한동·평대 등이다. 제주도 바닷가를 둘러쌓던 환해장성은 일제강점기의 신작로와 축항 구축 과정에서, 산업화시기에서는 마을 안팎 도로 조성과 사유지 확장 등으로 대부분 훼손되었다. 깊은 식견으로 지역에 대한 다양한 삶의 흔적들을 기록하고 있는 성산읍이 낳은 한림화 소설가가 채록한 바에 의하면, 온평리 해안가에는 원형의 환해장성이 1980년대까지만 해도 상당히 남아 있었다 한다. 특히 온평리의 환해장성은 삼별초와 관련해 1270년경에 축성된 것이라 한다. 최근 온평리 등 여러 마을 해안가에 복원된 환해장성은 원형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란 평이다. 이에 반해 구좌읍 행원리 동쪽 바닷가에 숨은 듯 있는 환해장성은 그런대로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한다. 

▲환해장성의 시원

즉위 과정에서 원나라의 도움을 받은 고려의 왕 원종은 1270년 천도해 있던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하기로 결정하고, 환도를 반대하는 삼별초를 해산한다. 그러자 배중손 등은 삼별초군과 반몽(反蒙)세력을 규합하고 승화후 온(承化侯 溫)을 왕으로 추대해 정부조직까지 갖추고는, 1만5000여 명을 이끌고 봉기해 진도에 용장성을 쌓고 항전에 들어간다. 이에 고려관군은 진도를 공격하는 한편, 삼별초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1270년 9월 고여림 장군과 김수 영광부사 등을 제주도에 보내어 명월포 등지에 성벽을 쌓고 지키도록 한다. 오래전 고장성 등으로 칭하던 것을 환해장성으로 처음 기록한 고서는 제주석학 심재 김석익이 편찬한 탐라기년(耽羅紀年, 1918)이다. 이 고서에는 다음의 기록도 있다.

‘1845년 정의현 소속인 우도 바닷가를 중심으로 해안을 탐험한 영국군함 사마랑호가 제주도 삼읍 해안에 머문 기일은 20일 정도이다. 영국함선의 무력을 실감한 권직 목사는 같은 해 겨울 삼읍의 백성을 동원해 해안가에 환해장성을 고쳐 쌓게 했다.’ 

우도와 온평리 등지에는 당시에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환해장성이 제주의 어느 곳보다 많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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