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라에서 제주로…섬나라에 담긴 역사를 엿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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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 탐라·동도·정의현 역사문화 깃든 길

신방굴 초입 세워진 ‘탁라가’ 시비
제주 정체성 다룬 김종직의 시 담겨
삼국시대의 탐라국, 타 나라와 교역 
1105년 고려에 귀속되며 독립국서  
지방 행정구역인 탐라군으로 변경
삼을나는 벽랑국 삼공주를 맞고 신방굴에서 초야를 치렀다. 사진은 서귀포 성산읍 온평리 신방굴 내부.
삼을나는 벽랑국 삼공주를 맞고 신방굴에서 초야를 치렀다. 사진은 서귀포 성산읍 온평리 신방굴 내부.

▲온평리 신방굴과 혼인지 입구 시비의 정체는?

탐라개벽신화와 관련해 혼인지와 신방굴이 있는 온평리의 유물유적을 답사하다 만나는 표석 중에는, 신방굴 초입에 조성된 혼인지의 유래를 알리는 거석과 함께 ‘탁라가’라는 시비도 있다. 자세한 안내판 없이 한자와 한글로 새겨진 시비를, 사람들은 흘긋 쳐다보며 지나치기 일쑤이다. 

하지만 비석에 새긴 ‘탁라가(羅歌)’는 탐라의 정체를 다룬 유명한 시로, 지은 이는 조선 유림의 영수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다. 1453년 과거 급제 이후 이조참판·홍문관제학·공조참판 등을 두루 지낸 김종직은, 동국여지승람 편찬에도 관여할 만큼 문장과 사학에도 능했다. 조의제문(弔義帝文) 사건으로 폭군 연산군에 의해 부관참시를 당했다가, 중종반정으로 신원된 김종직은 제주에 온 적이 없다. 

그런데 1465년 2월 ‘직산의 성환역(천안시 지경)’에 묵던 중 제주에서 약물을 진상하러 가는 김극수를 만난다. 밤 늦도록 김극수에게 제주의 풍토와 물산에 관해서 질의한 것을 기반으로 해 지은 시가, 그 유명한 ‘탁라가’ 14수이다. 
탁라가는 제주의 정체성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내용들이 담겨 있어, 여기에 한글로 전문을 옮긴다. 다만 원문은 지면관계로 14수 각 연 끝 행만을 옮긴다.

혼인지에 있는 김종직의  ‘탁라가’ 시비.
혼인지에 있는 김종직의 ‘탁라가’ 시비.

▲탁라가(羅歌) 전문

우정(郵亭)에서 인사를 나누니 서로 친구가 되었네. 무거운 보자기엔 진기한 약물들, 옷소매엔 비린내 끼고 말씨는 더듬으니, 그대는 정말 바다 섬사람일세(看君眞是海中人). / 처음 나라 세운 神人들은 해 뜨는 곳에서 온 이들과 짝지어 살았으니. 오랜 세월 세 성씨 혼인으로 전해오는 풍속이 주진촌(주씨와 진씨 두 집안이 혼인하며 화목하게 살았던 중국의 촌락명)과 같다네(遠風見設似朱陳). / 성주의 작호는 이미 없어지고 왕손도 끊겨 신인의 사당은 황량해도, 해마다 원로들 옛 조상을 추모하고, 광양당에선 북소리 징소리 들린다네(簫鼓爭陳廣壤堂). / 물길 수천 리를 어찌 다녔을까, 해마다 왕래하여 일찍부터 바닷길 잘 안다고 소문났네, 구름 속 돛 올려 편풍 만나 살같이 달리면 해남 도착이 하룻밤 길(一夜便風到海南). / 한라산 아득한 기운이 방성과 통하여 물과 풀 사이에는 살찐 말들 노닐고, 몽고 오랑캐가 목장 관리한 때부터 좋은 말들 궁궐로 들여보냈다지(驊騮歲歲入天閑)​. / 오매와 거북 등껍질과 흑산호와 청귤 진피는 다른 곳 어디에도 없는 것, 귀한 것 올려와 정미롭고 영특한 효능으로 사람들을 살려내고 있다네(精英盡入活人須). / 차오와 명합과 바위에 붙은 굴과 입이 큰 물고기와 문어의 종류는 또한 몇 가지인가, 해질녘 온 마을엔 비린내가 번져오고, 근심하던 모든 배들 생선 싣고 돌아온다네(水虞千舶泛鮮還). / 가을 서리 깊어 오면 집집마다 귤과 유자 익어 광주리 가득 담아 바다를 건너면, 대관이 받들어 빛과 맛과 향기도 온전하게 임금께 올린다네(宛宛猶全色味香). / 사또의 기마대 도처로 에워싸 꿩 토끼 노루 사슴 온갖 짐승 잡고, 바닷속 섬엔 곰과 호랑이 표범이 없어 숲속에서 노숙해도 놀라게 할 이 없다네(林行露宿不驚疑)​. / 뜰에서 구렁이를 만나면 술 따르고 향 피워 비는 이 지방 풍속, 육지 사람들은 놀라고 두려워하여 비웃지만, 도리어 죽통에 있는 지네까지도 원모(怨慕)하네(還怨吳公在 竹筒). / 여염집 자제들도 향교에서 유학하여 글을 즐겨 읽어 많은 인재 길러내고, 넓은 바다 건너온 이들 종종 높은 벼슬에 오른다네(翹村往往擢巍科). / 무두악(한라산) 정상에는 신령스러운 못이 있어, 가뭄에 마르지고 비가 와도 불지 않고, 벼락 천둥 구름 아지랑이 갑자기 일어나, 그 누구도 신령의 위엄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다네. / 화탈도 서쪽 조류가 서로 부딪쳐 우레가 치듯 뿜어내는 높은 파도, 만곡(萬斛)해추(海鰌)가 훼방 놓아 지나가는 배 기울어지면, 바다 건너던 사람들 목숨 새털 같다네(行人性命若鴻毛) / 순풍 기다려 조천관에 당도하여 지인들 만나 술잔 권하고, 부슬부슬 비 내리리는 대낮, 마치 큰고래가 숨을 내뿜는 기운이라 전하네(知是鰍魚噴氣來​).

탐라지도병서(18세기 제작).
탐라지도병서(18세기 제작).

▲탁라·탐라·제주에 깃든 역사문화 엿보기

제주는 바다 건너에 있는 고을이고, 탐라는 신라와 같은 왕국이다. 그래서 한라문화제도 탐라문화제로 명칭이 바뀌었다. 
국내외 여러 역사서는 제주도를 주호(州胡)·도이(島夷)·탁라(托·羅)·동영주(東瀛洲)·섭라(涉羅)·탐모라(耽毛羅)·탐부라(耽浮羅)·토화라(吐火羅)·도화라(都火羅)·도탐라(都耽羅)·둔라·모라·담라·탐라 등으로 기록하고 있다. 도(島)를 섬이라 하듯, 탐·담·섭 등의 음이 섬과 흡사해, 도국(島國) 즉 섬나라의 의미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3세기 경 중국의 진수가 편찬한 ‘삼국지위서동이전’에 기록된 내용이다. 

“마한의 서쪽 바다 가운데 큰 섬이 있는데 주호(州胡)라 한다. 섬사람들은 체구가 작고 언어는 한(韓)나라와 다르며, 모두 머리를 짧게 깎아 선비족과 비슷하다. 가죽옷을 입었는데 윗도리만 입고 아랫도리는 없어 마치 벗은 모양과 같다. 소와 돼지를 잘 기르고 배를 타서 한(韓)나라와 중국과 왕래하며 장사를 한다.”

‘476년(백제 문주왕 2년) 탐라국에서 방물(方物:지방특산품)을 바치니 왕은 기뻐하며 사자에게 은솔(恩率)이라는 벼슬을 내렸다.’라는 삼국사기 기록에서 엿보듯, 탐라국의 독자적생존방식은 조공외교였다. 조공은 복속과 종속의 의미가 아니라, 강대국 주변에 위치한 약소국의 생존방식이었다. 조선이 중국에 취한 외교 전략과 같은 맥락이다. 
신라 선덕여왕은 645년 황룡사 9층 목탑을 건립했다. 신라를 위협하는 주변 9개국을 제압해 조공을 바치게 하겠다는 염원에서 세워졌다 한다. 주변 9개국(중국‧일본‧오월‧거란 등) 중 4층에 언급되고 있는 나라가 ‘탁라(羅)’인데, 탁라는 탐라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이렇듯 탐라국은 송나라·당나라·일본·유구 등 여러 나라와 교역을 할 정도로 조선술과 항해술이 뛰어났다. 
탐라에서 한반도로 가는 뱃길 중 가장 짧은 곳 중 하나가 탐진이다. 탐진은 지금의 탐진강이 흐르는 강진 일대 지역을 말한다. 탐라라는 지명은 탐진의 탐(耽)자와 신라의 라(羅)자에서 비롯되었다 전한다. 탐진(耽津) 역시 탐라로 가는 나루터의 의미가 실린 지명이다. 
탐라국이 한반도의 역사 속에 편입돼 중앙에서 지방관이 파견된 것은 1105년(숙종 10년) 이후이다. 
이때부터 탐라국은 고려의 지방행정구역의 하나인 탐라군(현)으로 바뀌면서 독립적 지위는 막을 내린다. 
이어 1214년(고종 원년)에 탐라군을 제주군이라고 고쳐 부르고, 1273년 여몽연합군에 의한 삼별초 정벌 이후 이 땅은 원의 직할지가 되면서 제주라는 지명 대신에 탐라라는 국명을 다시 사용한다. 
고려의 속국인 제주가 아닌, 독립국인 탐라를 복속했다는 원나라의 의도가 읽혀진다. 1295년 제주도가 고려에 의해 주읍으로 승격되면서 일시 목사가 파견되고, 1374년 최영 장군 일행이 ‘목호의 난’을 평정하면서 탐라에 대한 원 지배는 막을 내리고, 탐라가 아닌 제주는 1392년 개국한 조선의 한 지역이 돼 지금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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