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한 기운이 깃든 마을의 신화를 마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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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 탐라·동도·정의현 역사문화 깃든 길

표선면서 가장 작은 마을 토산리
오름과 바다로 인해 전경 뛰어나
삼성신화 속 부을나가 선택한 땅
1500년 이상의 역사 갖고 있어
토산바다는 토산2리 마을회관 언덕 혹은 새당모루턱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뛰어나다. 사진은 윤슬이 반짝이는 토산바다 전경.
토산바다는 토산2리 마을회관 언덕 혹은 새당모루턱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뛰어나다. 사진은 윤슬이 반짝이는 토산바다 전경.

탐라개국 설화가 깃든 성산읍 온평리에 이어, 이번 회부터는 표선면과 성산읍의 오래된 마을들인 토산·수산·가시·성읍 등에 깃든 역사문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우선 표선면에 위치한 토산리를 먼저 소개한다. 

▲작지만 오래된 마을 토산리 
토산리는 표선면에서도 가장 작은 마을이다. 제주의 25봉수 중 토산봉수대가 원형으로 남아있는 망오름 사이, 알토산과 웃토산에 사는 사람을 다 합쳐도 2023년 기준 487세대에 천명 남짓이다. ‘알토산’이라 불리는 토산2리로 향하는 일주도로를 제외하면 마을을 지나는 길도 작은 편이다. 예전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꼬불꼬불한 작은 길이다. 작은 길 어딘가에 어쩌다 서 있는 한 두 채의 집도 작다. 외지인들이 들어와 집을 짓고 가게를 내고는 있지만, 아직 시야를 가릴만한 큰 건물이 들어서지도 않았다. 작지만 깔끔하고 예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산다. 

토산(兎山)이란 지명처럼 토산에서는 말을 할 때도 토끼처럼 입을 오므리고 말을 해야 할 듯싶다. ‘토산’이 그렇고 ‘알오름’이 그렇다. 두 손을 입에 대고 먹이를 먹는 토끼의 모습처럼 동글동글 굴러다니는 발음이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여기선 ‘알오름’도 ‘알오롬’이라 해야 할 것 같다. 

토산리 동쪽으로는 봉긋한 가세오름이 세화리와 토산을 나누고 있다. 서쪽으로는 표선면과 남원읍을 가르는 송천이, 남쪽으로는 토산1리와 2리를 나누는 망오름이 있다. 북쪽으로는 1136번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가시리에 닿는다. 

1136번 도로에서 바라본 망오름.
1136번 도로에서 바라본 망오름.

일주도로를 타고 남원에서 표선면으로 접어드는 지점의 송천교에서 바라보는 토산2리 마을 전경은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아름답다. 나지막한 언덕배기에 층층이 서 있는 집들과 그 집들을 둘러싸고 있는 울창한 나무들이 마을을 포근하게 감싸 안고 있다. 토산2리 마을회관 언덕, 혹은 새당모루턱에서 바라보는 바다 풍경은 감탄사조차 사양하도록 만든다. 수평선에 맞닿아 있는 넓고 푸른 바다는 윤슬을 반짝이기도 하고, 한편으론 하늘의 구름을 바다로 끌어내리며 곧 뭔가 일을 저지를 것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한다. 또한 바다를 벗어나지 못한 파도가 제 인생의 굴레를 벗어나려는 사람처럼 광포하게 날뛰기도 한다. 

그럼에도 바다와 육지 사이 비무장지대처럼 펼쳐져 있는 현무암 지대가 파도로부터 육지를, 육지로부터 바다를 우직한 모습으로 보호해 주며 서 있다. 해마다 불어오는 태풍도, 해마다 불어오는 개발 열풍에도 마을을 지켜줄 것만 같다. 

제주 사람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한라산 풍경을 볼 수 있는 데가 어디냐 물으면 열이면 아홉, 자기가 나고 자란 고향에서 보는 풍경이라 답한다. 토산에서 바라보는 한라산의 실루엣 또한 어릴 적 아름다운 추억처럼, 꿈결처럼 아름답고 아스라한 풍경이다. 서쪽 하늘 저 멀리 4월까지도 채 녹이지 못한 하얀 눈을 모자처럼 쓰고 서 있기도 하고, 하루의 고갯마루를 넘기는 태양을 끌어당기며 점점 가까워져 가는 어둠을 가만가만 다독이기도 한다. 그 모습을 보며 아이들은 토산 올레길을 나가 먼 길을 걸어 세상으로 나가고, 그렇게 나간 아이들이 세상을 한 바퀴 돌고 어른이 돼 돌아올 때까지 서녘 하늘에 걸린 한라산은 그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 서 있다. 

토산 거슨새미.
토산 거슨새미.

중국 송나라가 보낸 고종달도 끊지 못한 물의 혈이 남아 아직도 거슨새미와 노단새미가 흐르고, 그 물길을 따라 이어온 천년의 역사가 살아있는 마을, 그 천년의 역사 위에 이야기가 덧붙여져 전설과 신화가 공존하는 마을 토산. 이 마을에는 언제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을까. 

▲기록으로 본 토산리 마을

토산에 대한 기록을 뒤지다 보면 삼성신화에 가 닿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삼성혈에서 삼신인께서 동시용출(同時湧出)했다는 탐라개벽 신화 말이다. 1454년에 간행된 세종실록지리지에 소개된 삼성신화의 구절은 다음과 같다. 

“세 사람이 나이 차례대로 나눠서 혼인하고, 샘이 좋고 땅이 기름진 곳에 나아가서 화살을 쏘아 살 땅을 선택하였는데, 양을나가 사는 데를 ‘제일도(第一都)’, 고을나가 사는 데를 ‘제이도(第二都)’, 부을나가 사는 데를 ‘제삼도(第三都)’라고 하였다.”

학자에 따라 ‘제일도·제이도·제삼도’는 지금의 제주시 ‘일도동·이도동·삼도동’이라 추정하기도 하는데, 1702년(숙종 28) 제주목사로 부임했던 이형상 목사가 쓴 남환박물(1704년)에는 ‘고씨세계록’을 인용해 일도·이도·삼도의 위치를 설명해 놓고 있다. 여기에 토산이 나온다. 처음에 삼을나가 땅을 나눠 살았는데, 그들이 사는 곳을 도(徒)라 했다. ‘고씨세계록(高氏世系錄)’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세 사람이 활을 쏘아 살 곳을 나누어 정하였다. 고을나가 살던 곳을 ‘제일도(第一徒)’라고 하였는데 한라산 북쪽의 일도리(一徒里)이다. 양을나가 살던 곳을 ‘제이도(第二徒)’라고 하였는데 한라산 오른쪽 날개의 남쪽 산방리(山房里)이다. 부을나가 살던 곳을 ‘제삼도(第三徒)’라고 하였는데 한라산 왼쪽 날개의 남쪽 토산리(土山里)이다.”

삼신인이 쏜 화살의 위치가 지금의 제주시, 대정지역 그리고 토산이라는 얘기다. 신화에 따라 이들이 화살을 쏜 장소를 ‘살손장오리’라 한다면, 한라산 중턱에서 토산까지 도저히 화살이 닿을 것 같지는 않지만, 뭐 어떠랴? 그렇다고 살손장오리에서 제주시까지 화살이 닿았다는 얘기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다. 삼신인의 신체가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것보다 월등히 컸다는 얘기도 있는데, 삼신인의 세계에서는 살손장오리에서 제주시까지, 혹은 토산과 대정까지의 거리가 문제 되지는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지 않은가. 

그럼에도 토산에 부씨 성을 가진 사람들은 필자가 기억하기에 딱 한 가구였다. 삼성신화에 나오는 우렁우렁한 신체를 가진 남자도 아니었고, 바다를 건너온 신비롭고 아름다운 모습을 한 여인도 아니었다. 제주의 여느 남정네와 여인네의 모습을 하고 평범하게 사는 사람들이었다. 현실과 동화 속 세계가 황당무계하게 얽혀 돌아가는 내 어릴 적 머릿속에서는, 어쩌면 먼 옛날 부을나의 후손들이 이렇게 평범한 모습으로 살아가다 어느 날 문득, 거인족의 후손이라는 그 본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을까, 그게 언제일까 하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들을 지켜보곤 했었다. 

토산초등학교 앞 골목에 사는 부씨 성을 가진 집이 아직도 남아있는지, 그 가족들이 아직도 거기에 살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하긴 토산 동쪽 인근 마을들에는 부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집단거주 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화살을 쏘아 살 땅을 정하고 바다에서 건너온 아내를 맞이해 토산의 땅을 일구었을 맨 처음의 부을나, 그 자손이 자손을 낳고 그 자손이 또 자손을 낳아 토산 땅을 지키며 살아온 지 아주 오랜 시간, 드디어 지금 여기, 우리를 만나 삼성신화를 논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신성한 기운이 우리를 전율하게 한다. 

‘영주지’에는 고을나의 후손인 고후·고청·고계 등 삼형제에게 신라왕이 각각 작호를 주고 국호를 ‘탐라’라 칭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476년(문주왕 2)에 백제와 통교해 벼슬을 받는 등 수교를 하다가 498년(동성왕 20)에는 그 속국이 됐다는 기록이 있는데, 문주왕 2년인 476년을 기준으로 삼아도 이미 그 이전부터 토산이라는 지명이 있었던 것이고, 그렇다면 토산은 적어도 1500년 이상의 역사를 갖고 있다고 해도 무방할 듯싶다. 1500년의 역사를 추정하게 하는 ‘고씨세계록’을 지나서 다시 토산에 대한 기록은 고려 충렬왕 때 와서다. 1284년(충렬왕 10)에 원나라가 총관부를 없애고 탐라군민안무사를 두었다가, 1295년(충렬왕 21) 탐라를 제주로 고치고 목사와 판관을 두었다. 이로부터 5년 후 동·서도현을 설치하고 현촌을 설치했다. 이때 14개의 현촌 중 하나가 바로 토산현이다. 이후 토산은 1416년(조선 태종 16) 제주 삼읍 중 정의현에 속했다가, 1780년(정조 4) ‘제주읍지’에 의하면 정의현 중면에 속했다. 1914년 제주군 동중면 토산리로, 1915년 도제(島制) 실시로 제주도 동중면 토산리로, 1935년 동중면이 표선면으로 바뀌면서 표선면 토산리가 되었다. 해방 후 1946년 8월 도제(道制) 실시로 제주도 남제주군 표선면 토산리가 되고, 1948년 토산1리와 2리로 나누어져 오늘에 이른다. 

<글·사진=토산리 출신 김연미 질토래비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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