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 깃든 물줄기가 마을로 흐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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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 탐라·동도·정의현 역사문화 깃든 길

물 풍부해 일찍이 형성된 토산 마을
한라산 쪽으로 흘러내리는 거슨새미
바다를 향하는 물줄기는 노단새미
고종달과 수신(水神) 이야기 담겨
수신이 숨었던 행기 묻은 행기무덤
주민들의 신령스런 의지처로 남아
새로 정비된 거슨새미. 망오름 북쪽 산자락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 가운데 한라산 쪽으로 흘러내리는 물줄기엔, 거슬러 오른다는 뜻의 ‘거슨새미’라는 이름이 붙었다.
새로 정비된 거슨새미. 망오름 북쪽 산자락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 가운데 한라산 쪽으로 흘러내리는 물줄기엔, 거슬러 오른다는 뜻의 ‘거슨새미’라는 이름이 붙었다.

▲거슨새미와 노단새미가 흐르는 토산리

토산이란 마을에 여느 곳보다 일찍 마을이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은 물 덕분이다. 예로부터 물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모여 살았고, 사람이 모여 사는 곳에는 어김없이 그들의 생명수인 물이 필연적으로 존재해왔다. 토산도 그런 곳 중 하나다. 서쪽으로 완만히 흘러내리는 망오름 산자락이 남원읍과 표선면을 가르는 송천을 앞에 두고 오름의 맥을 다 내려놓을 때, 산자락 품속에서 흘러가던 지하수가 모습을 드러낸다. 망오름 북쪽 산자락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 가운데 하필이면 한라산 쪽으로 흘러내리는 물줄기엔, 거슬러 오른다는 뜻의 ‘거슨새미’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리고 망오름 산자락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물은 바다를 향해 흘러내려 ‘노단새미’라는 이름이 붙었다. 

거슨새미 표지석.
거슨새미 표지석.

노단새미는 ‘오른쪽에 있는 샘’이라는 뜻이다. 노단새미는 이 샘을 지칭한 사람들의 위치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이름이다.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대략 망오름을 앞에 두고 서쪽에서 바라보는 위치, 그래야 이 샘이 오른쪽이 되는 것이다. 이 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 사람들은 아무래도 마을 서쪽 송천 어디쯤에 서 있었을 것이다. 

물을 가까이 두고 터전을 잡았던 사람들은 풍부한 물과 너른 땅을 일구며, 풍족하지는 않지만 행복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마을이 커지고, 그렇게 커진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송천을 사이에 두고 자기들만큼 구역을 나누어 마을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토산 마을은 송천 동쪽 지경으로 경계를 이루며 살았을 것이다. 오래전 절이 있었다 해 ‘절려왓’이라 불려 온 지역에서 설촌의 역사가 시작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토산 마을은, 한편으론 바다로 향하고, 한편으로 점점 북쪽으로 올라와 지금의 알토산과 웃토산으로 나눠졌을 것이다. 

여전히 물이 솟아나고 있는 노단새미.
여전히 물이 솟아나고 있는 노단새미.

▲거슨새미와 노단새미 전설

거슨새미와 노단새미에는 제주의 물과 산의 혈을 끊으려 왔던 고종달의 전설이 깃들어 있다. 

어느 날 토산 마을에 사는 농부가 ‘넌밭(너른 밭)’을 갈고 있는데, 한 처녀가 황급하게 다가와 농부에게 호소를 하였다. “농부님, 죄송하지만 저기 저 샘물을 떠다가 어디 좀 숨겨 주실 수 있겠습니까?” 농부는 처녀의 행색이나 말하는 내용이 의아하긴 했지만 어려운 일도 아니어서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마침 점심을 먹고 남은 빈 행기그릇이 있어 그걸로 근처에 있는 샘물을 떠다가 소의 잔등에 씌었던 쇠질메 아래 놓아뒀다. 그리고 농부는 무심하게 또다시 소를 몰고 밭을 가는 데 열중했다. 그걸 보고 있던 처녀는 농부가 제 할 일에 몰두해 있는 사이에 순식간에 몸을 변하게 해 행기그릇에 담긴 물속으로 사라졌다. 처녀가 행기그릇 속으로 사라지자마자 지금까지 흘러넘치던 샘물은 흔적도 없이 말라버렸다. 

처녀가 몸을 감추고 나서 얼마 후 웬 수상하게 생긴 사내가 근처에 나타났다. 사내는 농부가 밭을 갈고 있는 근처를 왔다 갔다 하면서 뭔가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혼자 찾기를 포기했는지 사내는 농부에게 다가와 물었다. “저, 여기 근처에 고부랑낭 아래 행기물이 있다고 했는데, 혹시 어딘지 아십니까?” “내가 여기서 나고 자랐는데 지금까지 그런 물이 이 근처에 있다는 얘기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소.” 하고 농부는 대답했다. 농부의 말을 들은 사내는 들고 있던 지도를 박박 찢어버리면서, “이 지도 믿을 게 못 되는군.” 하면서 서쪽으로 떠났다. 

짐작대로 지도를 들고 나타나 고부랑낭 아래 행기물을 찾던 사내는 고종달이었으며, 급하게 와서 농부에게 물을 떠다 숨겨달라던 처녀는 샘물을 지키는 수신(水神)이었다. 고종달이 물의 혈을 끊으러 온다는 사실을 알고 수신이 급하게 몸을 숨겼던 것이다. 고종달이 가지고 있던 지도에는 이미 그 수신이 행기물을 이용해서 쇠질메 아래 숨을 것까지 미리 예상하고 ‘고부랑낭 아래 행기물’이라 표기했던 것인데, 농부는 물론이고 고종달마저 이를 알 리가 없었던 것이다. 덕분에 샘물은 혈이 끊기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 샘물이 마을 주민들에게 풍부한 식수원을 제공해 주었던, 지금의 거슨새미와 노단새미다. 사람들은 당시 수신이 들어가 숨었던 행기를 따로 묻어주며 그 의미를 되새겼다 한다. 지금의 행기무덤이 바로 그것이다. 

행기무덤 위에 조성된 화단.
행기무덤 위에 조성된 화단.

▲토산마을의 신령스런 행기무덤

행기무덤은 거슨새미 가는 길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토산리 1385-3번지에 있다. 돌덩이 몇 개 쌓아올려 조그마한 무덤처럼 보이는 그곳은, 얼핏 보면 무덤이라 짐작하기도 어렵다. 그 속에 정말 행기가 있었던 것인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토산에서 나고 자란 어른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행기무덤에 여러 차례 도굴이 있었다고, 그러는 와중에 무덤의 형태도 흐트러져버렸다고 했다. 그럼에도 오래전부터 그것을 행기무덤이라 불렀던 것은 분명하다고도 했다. 

온통 바다라는 물속에 갇혀 살아도 섬에 사는 사람들은 항상 목이 마르다. 한 방울의 물이 절실한 삶이었다. 그들에게 생명수와 같았던 샘물, 그 샘물을 지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해 주었던 행기를 사람들은 이렇게라도 예를 차리며 기리고 싶었던 게다. 물을 지켜낸다는 것은 곧 자신들의 목숨을 지켜내는 일이므로, 사람들은 그 행기무덤을 절대적 절망에서 나타나는 기적의 현현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미 한 번 실증된 기적, 그것은 그 이후에도 결코 녹록지 않았던 삶을 살아야 했던 사람들에겐 눈에 보이는 신령스러운 의지처였을 것이다. 
(글·사진=토산리 출신 김연미 질토래비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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