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8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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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한 / 수필가

“세상걱정 다 짊어지고 사시네요.”

서울의 한의사가 내게 던진 첫마디다. 얼굴과 체형만 보고도 어디가 허약하고, 어떤 약을 써야 효과가 있는지 용하게 처방을 내린다는 의사다. 방송에 소개되어 단단히 마음먹고 먼 거리를 찾아왔다.

의사는 보자마자 건강에 대한 말은 하지 않고 대뜸 걱정부터 내려놓으란다. 옆에서 지켜보던 남편도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많다는 말은 이해가 되는데 너무 완벽해서 자신은 물론 가족과 주변을 힘들게 한다는 대목엔 고개가 갸우뚱했다.

진맥 결과 위장과 신경계통이 약하다고 했다. 소심하여 스트레스를 받으면 금방 설사를 하고, 손해 봐도 신경 쓰기 싫어 포기를 빨리하며, 찬 음식을 싫어한다는 등 신기할 정도로 맞혔다. 남편은 의사가 한마디 던질 때마다 “맞아요, 맞아요.” 하며 추임새를 넣었다. 그는 약을 처방해주며 사람에게 기대를 낮추라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나는 어릴 적 몸이 약했다. 엄마는 동네 소먹이는 아이들에게 돈을 주어 개구리를 잡아오게 하여 푹 고아 주었고, 제사음복이 와도 허약한 나를 먼저 챙겼다. 결혼 전까지 따라다니며 보살펴준 어머니 덕분인지 청소년기를 지난 후부터는 그 흔한 고뿔 한번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유독 건강에 관심이 많았다.

오래전, 남편은 잦은 술 때문에 지방간으로 병원을 들락거렸다. 텃밭에 당근, 오이, 케일 등 각종 채소를 심어 매일 종류를 바꿔가며 녹즙과 건강식을 만들어주었다. 지방간은 큰 병도 아니고 대부분의 남자들이 다가지고 있는데 쓸데없는 염려를 한다고 핀잔도 들었다. 병의 경중을 떠나 좋지 않는 것은 빨리 치료해야 큰 병을 막을 수 있다는 생각에 다그쳐 챙긴 것이다. 걱정이 많은 것은 어쩌면 힘든 일이 생기면 헤쳐 나갈 힘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늘 살얼음판 딛듯 조심조심 살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은 다시 건강을 되찾았다.

아이들 걱정에 한밤중에 기와집을 몇 채나 짓는다. 따로 살고 있으니 밥은 제대로 먹는지, 결혼은 언제 하려는지, 아픈 곳은 없는지, 직장업무는 제대로 하는지 괜한 염려로 끝이 없다.

걱정과 잔소리는 일맥상통한다. 무엇이든 알아서 하겠다는 아이들과 작은 일 하나도 지나치지 않는 나와는 충돌이 잦다. 외식할 때면 나는 가위부터 든다. 살코기에 붙은 기름기를 떼어내기 위해서다. 오리기름은 해롭지 않다고 남편은 아이들 편에 서지만 기름은 기름일 뿐이다. 귀찮던 잔소리가 자신들을 위한 것임을 알았는지 요즘은 아이들이 나보다 먼저 가위를 든다. 세월이 흐르면서 크고 작은 잔소리들이 가랑비에 옷 젖듯 행동과 습관을 조금씩 바꿔놓았다.

한집에서 같은 문제를 안고 사는데 남편은 나와는 대조적으로 도무지 걱정이 없다. 매사 낙천적이고 긍정적이라 일이 잘 되든 못 되든 무조건 좋은 쪽으로 해석을 한다. 남매 모두 직장 잡았으니 밥 굶을 걱정 없고, 아직 젊으니 언젠가는 배필이 나타날 거란다. 요즘은 만혼도 많으니 쓸데없는 걱정 말라고도 한다. 모든 일이 때가 되어 저절로 이루어져야지 걱정한다고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평소 지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과 자식, 주변과 세상 걱정들이 밀려오는 파도처럼 끝없이 이어졌다. 어느 학자는 우리가 하는 걱정의 96%는 쓸데없는 걱정이고, 나머지 4%만이 대처가 필요한 사건이라고 했다. 내 걱정이 없어지는 날은 언제일까?

지나온 인생의 8할을 걱정으로 살아왔다. 주어진 현실에서 행복을 찾기보다 막연한 염려로 조바심을 태웠다. 하지만 이제 쓸데없는 기우는 내려놓아야겠다. 내가 걱정하지 않아도 세상은 잘 돌아가고 아이들도 제 나름대로 잘 커가지 않는가. 그렇게 생각하니 몸이 한결 가벼워진다. 서울의 한의사가 명의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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