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未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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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한국 현대시의 계보 하면, 으레 소월에 이어 목월과 미당을 들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한 시대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시대를 풍미했던 시인들이다.

목월의 <나그네>와 미당의 <국화 옆에서>는 ‘고등국어’에 오래 실렸던 그들의 대표작의 하나로, 70~80대 노년층도 줄줄 암송하는 범국민적 애송시들이다. 그들의 시는 전통적·토속적·향토적 정서를 시화함으로써 공감의 큰 맥락을 이뤘다.

목월과 달리 미당의 경우, 굴곡진 삶을 살았던 분이라는 평가가 있어 시인으로서의 그분의 생애를 되짚게 한다.

‘내 마음 속 우리 임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미당의 <冬天>).

어떻게든 피안(彼岸)의 세계에 도달해 보려고 하나, 결코 이르지 못하는 인간의 숙명적 한계를 그려냈다. 그의 시 세계는 말할 것 없이 현묘(玄妙)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미당의 한 인간으로서의 삶은 시처럼 아름답지 못했다. 아끼는 제자 고은 시인의 <미당 담론>을 보면, 그의 부끄러운 삶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낯 뜨거운 시인의 모습을 낱낱이 파헤쳤다.

미당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을 찬양하는 10여 편의 시, 소설, 비평문 등을 썼다. 그중, ‘미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가미가제 특별공격대원/ 구국대원/ 구국대원의 푸른 영혼은/ 살아서 벌써 우리에게로 돌아왔느니…’로 시작되는 <송정 오장송가>는 당시 폭탄이 장착된 비행기를 몰고 자살 공격을 하던 특공대를 미화하는 데 자신의 시적 재능을 이용했다.

이에 그치지 않는다. 해방 이후 독재자를 기리는 이승만 전기를 썼고, 박정희 시절에는 베트남 파병을 촉구하는 시를 발표했다. 또한 전두환 정권이 들어설 때 TV에 출연해 그를 지지하는 발언을 했는가 하면, ‘한강을 넓고 깊고 또 맑게 만드신 이여’로 시작하는 <전두환 대통령 각하 56회 탄신일에 드리는 송시>도 발표했다.

그의 행적을 돌아볼 때, 하릴없이 친일(親日)할 수밖에 없었고, 소극적 자세로 가담했다는 그의 말은 신뢰하기 어렵다. 이후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절대 권력을 쥔 자에게 잘 보이기 위한 문학 활동을 했던 것 또한 그러해 우리를 퍽 난처하게 한다.

문학작품과 그 작품을 쓴 사람은 엄연히 다르다. 미당의 시에는 훌륭한 작품들이 참으로 많다. 하지만 그의 삶은 그다지 훌륭하지 않았던 것 같다. 반민족·반민주적 행동을 거듭해 왔다는 얘기다. 그가 창작한 뛰어난 작품의 문학사적인 가치는 인정하되, 그의 생애는 비판을 면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다. 제아무리 시가 빼어나다 하더라도 결국 시인이 살았던 시대에 대한 관점 또한 작품 속에 분명 녹아 있다고 봐야 한다. 그의 시를 비판적으로 봐야 하는 이유다.

연전, ‘미당문학관’ 전시실을 둘러볼 때였다. 문득 한 수필가의 글이 미당 시인 생의 전후(前後)를 돌아보게 했다. 미당의 도자기 공방시절, 도왔던 친구의 초등학생 딸이 선생에게 물었단다.

“할아버지, 미당이 무슨 뜻이에요?” 선생의 대답. “아직 덜 된 사람이란 뜻이란다.” 화중의 그 ‘미당(未堂)’을 속으로 뇌며 전시실을 나섰다.

‘입신양명(立身揚名)’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마라톤에 완주는 있어도, 인생에 ‘완당(完堂)’이란 없을 것이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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