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들의 삶이 녹아 있는 흔적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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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탐라·동도·정의현 역사문화 깃든 길

여러 마을의 식수원인 거슨새미
중요한 제수용으로만 쓰이는 상탕
식수대·빨래터인 중·하탕으로 구분
사시사철 수온 일정한 노단새미
겨울철에 따뜻해 빨래하기 좋아
거슨새미에서 자라는 미나리.
거슨새미에서 자라는 미나리.

▲토산리·신흥리·가시리·세화리 사람들의 식수원이었던 거슨새미

지난 회에 이어 이번 회에도 ‘거슨새미와 노단새미’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 그만큼 토산리를 비롯해 이웃마을 사람들에게도 중요한 식수원이었고, 그에 따른 이야기들이 지금도 회자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행기무덤을 지나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이 거슨새미다. 행기무덤에서 거슨새미까지, 그리고 서쪽 송천까지 넓게 펼쳐진 평야가 널따란 의미를 지닌 ‘넌밭 혹은 너븐밭’이라 불리는 곳이다. 전설에서 농부가 밭을 갈던 곳이다. 지금은 시설하우스가 들어서 있고, 태양광 패널이 자리를 차지했다. 이런 이유로 그 광활함을 한눈에 다 담을 수 없지만, 필자가 어렸을 때만 해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평야가 서쪽으로 아스라하게 이어지던 땅이었다. 

거슨새미에서 흘러내린 물은 상탕·중탕·하탕으로 넘치며 모여들었다. 상탕은 노단새미 물과 같이 포제나 중요한 제수용으로만 사용했기에 우리 같은 조무래기들은 접근이 불가능했다. 실제로 필자가 본 거슨새미는 어머니 물허벅이 놓여 있던 물팡 겸 식수대 옆 미나리밭, 그리고 길 하나 건너에 있던 빨래터 물이 전부였다. 

이 지경은 70년대 까지만 해도 토산리민들은 물론이고, 이웃마을들인 가시리·세화리·신흥리 등지의 사람들이 물을 길어다 먹었던 곳이다. 어쩌다 어머니 물허벅을 따라 중탕이었던 식수대에 가보면 동네 삼촌들이 갖다 놓은 물허벅이나 20L들이 플라스틱 물통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간혹 흙벽에서 흘러 떨어지는 물을 잘못 받거나 흐르는 물길을 발로 밟기라도 하면 어김없이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우리는 행동을 조심해야 하는 중탕보다는 길 건너 빨래터에서 노는 걸 좋아했다. 중탕에서 흘러내린 물은 미나리를 키우고 길 하나 건너 큰 웅덩이로 모여들었다. 물은 늘 풍부해서 소와 말의 목을 축이고, 미나리와 창포와 같은 물풀을 키우고, 마을 사람들의 옷가지 등을 빨아냈다. 손이 따뜻해지기 시작하는 봄부터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가을까지 빨래터의 물은 작은 바람에도 살랑거리며 동네 사람들의 옷을 깨끗하게 빨아주고 넌밭 어딘가로 흘러갔다. 

멀리 밭 가는 사람들이 일하는 소리가 들리고, 빨래터에서 빨래하는 동네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와 빨랫방망이 소리가 나른하게 들리는 봄날은, 필자가 기억하는 고향의 아름다운 봄 풍경 중 하나였다.

잡목 숲에 덮인 노단새미터.
잡목 숲에 덮인 노단새미터.

▲일정한 수온으로 겨울 빨래를 책임지던 노단새미

노단새미는 거슨새미에서 망오름 자락 하나를 넘은 남쪽에 자리 잡고 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우리는 노단새미로 모여들었다. 수온이 사시사철 일정한 샘물은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했다. 한겨울에 맨손으로 빨래를 해도 손이 시리지 않았다. 산자락이 서쪽으로 내려가는 언덕 깊숙이 허리를 내어준 노단새미는 아늑하고 포근했다. 

절벽 허리를 깊숙이 파고 들어간 곳에서 흐르던 물길을 찾아내고 그 물길이 밖으로 잘 흐르도록 소꿉장난 같은 물길을 내었다. 물은 그 길을 착실하게 흘러와 웅덩이에 고였다. 빗살무늬 토기처럼 생긴 물웅덩이 몇 개, 제단처럼 벽에 붙어 있고, 그 웅덩이를 다 채운 물은 다시 그 아랫단으로 흘러 작은 빨래터를 만들었다. 빨래터 위로는 절벽 위에 뿌리내린 나무들이 마치 지붕처럼 가지를 늘이고 바깥세상으로부터 보호해 주듯 서 있었다.

빨래터 형태가 남아있는 노단새미.
빨래터 형태가 남아있는 노단새미.

사람들은 함박눈이 펄펄 내리는 날에도 아늑하고 안전하게 맨손으로 빨래를 하고 물을 길었다. 돌아갈 때 조금이라도 무게를 덜기 위해 젖은 빨래는 나뭇가지에 걸쳐두었다. 물기가 조금이라도 빠지게 함이었다. 그러나 밖에 널어둔 빨래는 그대로 얼어붙어 나무토막이 되기 일쑤였다. 

빨래터 바깥으로는 함박눈이 펄펄 내리는데, 우리는 수증기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물에서 빨래를 했다. 그럴 때면 우리가 있던 노단새미가 신선들이 사는 세계 그 어디쯤에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동굴 속에 들어가 하얀 수염의 노인들이 두는 장기 구경을 잠깐 하고 나왔는데, 동굴 밖에 세워두었던 도끼자루가 썩어 있더라는, 전래 동화 속 그 장소 어디였을 것 같은 착각.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동굴이 아닌 동네 삼촌들의 목소리 왁자한 노단새미였고, 깨끗하게 빤 옷가지와 물통을 지고 돌아온 마을도 우리가 살고 있는 그 모습 그대로였다. 

거슨새미 물길.
거슨새미 물길.

▲지워지고 잊히는 노단새미·거슨새미의 흔적

지금은 노단새미 흔적을 찾기가 힘들다. 주변 땅들이 과수원으로 개간되고, 근처에 있는 사찰이 확장 공사를 하면서 물길도 흐트러져버렸다. 그러면서 빨래터 입구도 막아버렸다. 여기가 거기쯤일 것이라고 짐작하면서 찾아간 곳은 밭을 개간하면서 밀어붙인 흙무더기가 쌓여있어 접근조차 어려웠다. 풀숲을 헤치고 겨우 들어선 현장에는 낙엽들이 쌓이고, 나뭇가지들이 덮이면서 옛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나마 흙벽 아래로 흘러내리는 물줄기 몇 개와 콩짜개란이 남아 있어 여기가 거기였음을 겨우 증명해 내고 있었다.

지금은 식수를 위해 이곳을 찾을 필요도 없고, 손이 시리지 않은 빨래터가 필요한 때도 아니다. 그러나 이제 그 소용이 다 했다고 사람들에게 잊히고, 그 흔적마저 지워지고 있다는 사실은 정말 씁쓸한 일이다. 그나마 거슨새미 앞에는 관련된 전설과 이름이 새겨진 커다란 표지석을 세워 현장을 증명하고 있지만, 노단새미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만 남아 있는 곳이 돼버렸다. 

표지석이 세워져 있는 거슨새미도 안심할 곳은 못 된다. 갈수록 수량도 줄어들고 있다. 거슨새미가 있는 위쪽, 망오름 중턱에는 산 중턱을 깎아내는 대형 공사가 진행돼 있었다. 그런 대형공사가 계속되면 거슨새미와 노단새미를 지키는 수신도 더 이상 물길을 지켜내는 건 어렵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든다. 지금은 신들의 시대가 아니라 물질문명의 시대가 돼버렸으니 말이다. 이웃마을 사람들에게도 식수원이었던 전설 깃든 노단새미 거슨새미가 더욱 생각나는 요즈음이다.

(글·사진=토산리 출신 김연미 질토래비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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