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구의 침략을 망보던 망오름의 기운이 아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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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 탐라·동도·정의현 역사문화 깃든 길

토산 주민 곁에 울창한 나무·빨간 열매·고사리 자라는 망오름 존재
조선시대 방어시설인 토산봉수대 비교적 원형 그대로 남아 있어
중요 행사인 포제 지내며 조상신에 무사안녕과 농사 풍요 기원
망오름 전경. 망오름은 두 개의 분화구와 두 개의 봉우리를 가진 오름으로 해발 175m 정도 된다.
망오름 전경. 망오름은 두 개의 분화구와 두 개의 봉우리를 가진 오름으로 해발 175m 정도 된다.

▲망오름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

망오름은 두 개의 분화구와 두 개의 봉우리를 가진 오름으로 해발 175m 정도 되는 그리 높지 않은 오름이다. 울창한 소나무 사이사이 볼레나무들이 자라고, 그 아래엔 자금우와 백량금들이 빨간 볼을 내밀고 있다. 평등하게 내려오는 햇빛을 소나무와 같이 덩치 큰 나무들이 차지하고 나면, 그 아래엔 굳이 햇살을 많이 받지 않아도 생존이 가능한 것들이 모여 산다. 자신이 발붙인 곳에서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은 사람이나 동식물이 다르지 않다. 

토산리 주민들은 망오름에 기대어 산다. 이른 봄, 봄 햇살이 잠깐 왔다 간 곳이면 어김없이 고사리들이 올라온다. 
사람들은 밭일을 나가기 이른 새벽, 혹은 밭일을 끝내고 저녁 준비하기 전 잠깐, 오름 자락 아래로 나가 고사리를 꺾고 온다. 한 주먹씩, 한 바구니씩 그렇게 모아놓은 고사리는 주민들의 한 끼 밥반찬이 돼 주는 것은 물론, 철마다 지내야 하는 제사음식의 필수 준비물이 돼 준다. 
물음표처럼 고개를 숙인 고사리 옆에는 할미꽃이 나와 앉아 바람에 그 하얀 머리카락을 날리고 있었다. 
망오름의 소나무들은 겨울이면 부족한 땔감을 채워주는 곳이었다. 

볼레열매
볼레열매

학교를 마친 아이들은 끼리끼리 질빵 하나씩 들고 나가 숲속에 수북하게 깔린 솔잎을 걷어오고, 소나무의 마른 가지를 꺾어 한 짐씩 져 나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군것질거리가 많지 않았던 시절 망오름에는 먹을 게 지천이었다. 발갛게 익어가는 볼레열매는 물론이고, 청미래덩굴순이나 찔레순은 아이들에게 좋은 군것질거리였다. 
주변 마을에 사는 아이들은 이른 아침에 멀쩡한 길을 놔두고 꼭 망오름을 넘어 등굣길에 올랐다. 아이들이 걸어오는 모습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망오름 중턱에 앉아 뒤늦게 집에서 나온 아이들의 이름을 불렀다. 팔다리가 가볍던 아이들은 망오름 꼭대기까지도 단숨에 오를 수 있었고, 내려갈 때도 바람처럼 빨리 내려갔다. 오름 하나 오르고 내리는 게 장난 같았던 아이들이었다. 

흙으로만 만들어진 토산봉수대.
흙으로만 만들어진 토산봉수대.

▲망오름이란 이름 속에 포함돼 있는 봉수대

망오름이라는 이름 속에는 봉수대가 포함돼 있다. 조선시대 제주에는 방어시설로 25봉수대가 있었다. 그 중 하나인 토산봉수대가 망오름에 설치돼 있었다. 
토산봉수대는 동쪽으로 달산봉(표선면 하천리 1043-2)과, 서쪽으로 자배봉(남원읍 위미리 산132-1)과 신호를 주고받았다. 직선거리로 자배봉수와는 9km 남짓, 달산봉수와는 6km 남짓 된다. 

여섯 명의 별장과 열두 명 정도의 봉군이 배속돼 관리를 했다고 한다. 토산봉수는 중심 반경이 15m 정도 되고 내부 반경은 11m 정도 되게 둑을 이중으로 쌓았다. 둑을 이중으로 한 것은 우천 시 배수를 고려한 것이라고 한다. 
전체 둘레의 길이가 44m에 이를 정도로 토산봉수대는 다른 곳에 비해 규모가 큰 편에 속한다. 
제주의 봉수대는 보통 돌로 쌓거나 돌과 흙을 혼용하거나 오로지 흙으로만 쌓는 경우가 있는데, 토산봉수대는 흙으로만 돼 있다. 오름 꼭대기까지 돌을 운반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터이니, 흙은 봉수대를 만드는데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높이 1m 남짓한 이 봉수대는 다른 봉수대에 비해 비교적 원형 그대로 잘 남아 있는 편이다. 

지금은 나무들이 울창하게 들어서 있어서 남쪽 바다는 물론이고 동서를 조망하기가 쉽지는 않다. 망오름 동쪽 봉우리에 설치돼 있는 전망대에 올라서야 겨우 사방 조망이 가능하다. 
토산 여드레할망당과 관련됐다던 1552년(명종 7) 천미포 왜란, 그 당시에도 이곳에서 봉화가 올랐을 것이다. 남동쪽으로 왜구들이 탄 배가 보이기 시작하면 달산봉수에서 봉화가 오르고, 그 봉화를 이어받은 토산봉수는 다시 자배봉수로 소식을 전해 줬을 것이다. 
배들의 움직임에 따라 신경을 곤두세우던 별장들은 왜선들이 천미포에 도착하자마자 또다시 봉화를 올렸을 것이고, 그 소식은 또 동서로 빠르게 전파됐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뚜기모루에서처럼 겁탈을 당한 처녀들이 나오기도 하고, 순진무구한 사람들 중 더러는 목숨을 잃기도 했을 것이다. 폭력과 약탈에 노출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 몫이어야 하는 가 보다.

유교식 마을 제사를 지내는 토산 포제단.
유교식 마을 제사를 지내는 토산 포제단.

▲남자들의 전유공간 망오름 포제단

토산 여드레할망당이 여자들의 전유공간이었던 반면, 포제는 남자들의 전유물이다. 유교식 마을 제사를 지내는 포제단은 일 년에 한 번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음력 정월을 기본으로 해 마을 총회에서 날짜와 제관을 정한다. 
제관으로 정해진 사람은 3일 동안 합숙을 하면서 몸의 부정한 기운을 정화시킨다. 제관은 마을에서 덕망이 있는 사람이 선정된다. 제관으로 지정된다는 것은 그만큼 흠결이 없다는 뜻이므로 영광스러운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포제는 마을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 중 하나다. 마을을 지켜주는 조상신들에게 모든 마을 주민들의 안녕과 한해 농사의 풍요를 기원하는 일이니만큼 제관은 물론 마을사람들 전체가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한다. 

토산 망오름에 있는 포제단은 1993년 남제주군이 지정하는 향회 재현 마을로 선정되면서 새롭게 정비됐다. 
또한 진입로에도 184개의 계단이 만들어졌다. 마을 포제는 이곳 토산만이 아니라 도내 마을 곳곳에서 치러진다. 설 명절이 지나면 주민들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면서 각 마을마다 포제를 봉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마을 포제는 한때 새마을 운동 등의 영향으로 미신으로 치부되기도 하고, 공동체 문화가 끊기면서 사라질 위기에 놓이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마을에서 다시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이런 전통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엎드려 절을 한다고 해서 원하는 바가 다 이뤄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 제사를 준비하는 데 있어서 사람들의 마음이 만들어 가는 것은 소원성취보다 더 큰 것을 주기도 하기에 하는 말이다. 

(글·사진=김연미 토산리 출신 질토래비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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