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생각의 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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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건 / 수필가

서귀포 안덕면 서남쪽 사계리에 ‘단산’이라고도 알려진 ‘바굼지 오름’이 있다. 산방산과 송악산 중간쯤에 자리 잡고 있으며, 등산객들이 많지는 않지만 제주의 일몰 풍경 명소 중 하나라고 한다. 동서로 길게 누운 모양으로 약 2킬로미터, 해발 고도가 158미터 되는 오름으로 양끝이 뾰족하게 솟아 있어서 박쥐의 날개 같기도 한 기이한 모습이 눈길을 끈다. 오름의 뒷면에는 전문 등산객들이 등벽훈련을 하는 장소로 이용할 정도로 오름의 경사가 가파르게 전개 되어 있어서 오름을 둘러싼 벌판과 직각을 이루는 모습을 이루고 있다.

‘바굼지 오름’은 입구에서 꼭대기까지 커다란 암석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제주에서는 보기 드문 커다란 화강암 류의 바위가 이어져 있어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이다. 나는 여기에 오면 꼭대기 바로 밑까지 올라가서 낯익은 큰 바위 위에 앉아 있곤 한다. 이런저런 상념에 빠지는 순간이다.

산을 오르다가 잠시 한숨을 돌리고 싶을 때 주변에 넓적한 바위 하나 발견하게 되면 무척이나 반갑다. 정확한 과학적 근거는 모르겠지만 일부 전문가들에 의하면, 지구 자체는 하나의 자석이라고 할 수 있고 지자기(地磁氣)를 계속 방출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인간이 바위 위에 앉아서 기도를 드리거나 명상을 하면 지자기가 인체에 전달되고 바위의 기를 흡수하여 그 효과가 더 커진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 역시 바위에 앉아 잠시 생각에 잠길 때 왠지 정신집중이 좀 더 잘 되는 것 같다.

‘바굼지 오름’에서 내려다 보이는 풍경 중에 오랜 전통이 있는 ‘대정향교’가 있다. 추사 김정희가 그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고 하며, 건물 현판에 ‘동제(東齊)’, ‘의문당(疑問堂)’이라는 그의 글씨도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추사와 꽤나 인연이 깊은 향교인 듯하다. 바위에 앉아서 추사를 생각한다. 8년 3개월이라는 긴 세월 동안 외롭고 힘든 유배 생활을 달래기 위해 수선화를 키우며 친구들에게 자랑했다는 추사. 그가 향교에 왔다가 생각이 많아질 때는 나처럼 이 ‘바굼지 오름’을 올랐을 것만 같다. ‘혹시 그 옛날 추사도 내가 앉은 이 바위 위에 앉아서 풍경을 즐기며 깊은 생각에 잠겼던 것은 아닐까?’

충청도 청주시에 있는 ‘운보의 집’, 김기창 화백의 기념관에도 이와 비슷한 얘기를 담은 바위가 있다. 운치있고 호젓한 넓은 마당 한 곳에 연못이 있고, 그 한가운데에 커다란 바위가 소나무와 같이 잘 어우러져 놓여 있는데, 김 화백이 생각이 막히거나 아이디어가 잘 떠오르지 않을 때에 그 바위 위에 앉아서 명상 시간을 갖곤 했다고 한다.

이탈리아에 있는 성 프란시스코의 성전(아씨시 성전)에도 프란시스코가 지하실의 넓고 커다란 바위 밑에서 기도했다는 얘기가 전해지며, 핀란드 헬싱키에는 세계적인 관광지이기도 한 ‘템펠 리아우 키 로코’라는 교회가 있는데, 이 역시 매우 커다란 암석 속에 만들어진 교회다. 암석에 교회를 지었으니 거기서 기도를 드리던 성직자들과 신도들도 기도에 더 집중하며 신앙을 키웠을 것 같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바굼지 오름을 오르다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고요한 사색에 빠져 내가 살아온 생활을 반성해 보고 잡다한 욕심을 하나 둘 정리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린다. 나는 거기 앉아 있던 자리를 ‘생각의 팡’이라고 이름 붙여보았다. 여기에서 ‘팡’이라는 의미는 ‘잠시 쉬는 곳’이라는 제주 방언이다. 고향 바닷가의 ‘생각의 팡’, 용진각에 있는 ‘생각의 팡’, 어승생악에 있는 ‘생각의 팡’에 이어 또 하나의 ‘생각의 팡’이 바굼지 오름에 추가되었다. 나는 생각이 막힐 때면 나만의 ‘생각의 팡’을 찾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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