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오름과 송천에 새겨진 슬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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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 탐라·동도·정의현 역사문화 깃든 길

4·3으로 토산 주민들 무고한 희생 
“달을 봐라”하고 젊은 여자 끌어내
18~40세 남자 군인에 끌려가 처형
남은 자식을 위해 살았던 어머니
고마운 마음 담아 어머니상 세워
음력 11월 17일과 18일 제사 지내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바닷가에 세운 4·3 어머니상.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바닷가에 세운 4·3 어머니상.

▲토산 바닷가에 세운 4·3 어머니상

그 긴 세월 어려움을 겪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겠지만, 제주 4·3은 유독 토산마을에 가혹했다. 이백여 호 남짓하던 마을에서 157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것이다. 4·3으로 인한 무남촌(無男村)이 된 마을이 한두 곳이 아니지만, 토산은 더했다. 젊은 남자들이 다 사라지고 난 마을엔 노약자와 여자들뿐이었다. 

눈망울 올망졸망한 자식들을 건사하기 위해 삶을 놓아버릴 수 없었던 어머니들은 몸이 부서져라 일을 했다. 동이 터오는 아침보다 먼저 일어나 밭일을 하고, 물때를 기다려 바다에 나갔다. 하루 종일 일을 하다 지친 몸으로 돌아와 아이들을 챙겼다. 아이들은 어머니의 품에서 꺼낸 먹이를 입으로 받아먹으며 제비처럼 자랐다. 제 부모의 부지런함을 보고 배운 아이들이 착실하게 제 앞가림하며 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알토산 송천교 옆에는 바다를 등지고 앉은 석상이 하나 있다. 애기구덕을 앞에 두고 앉은 어머니 형상을 한 모습이다. 아버지도 없이 자식들을 먹여 살려야 했던 우리들의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을 담아 세웠다. 금방이라도 아이를 구덕에서 꺼내 젖을 물릴 것 같은 어머니의 등 뒤로 토산 앞바다가 시원스레 펼쳐져 있다. 시야에 걸리는 것 하나 없이 넓은 바다 위로 윤슬이 반짝인다. 이 눈물 나는 평화를 위해 토산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날들을 눈물로 보내야 했던가. 

서귀포시 표선면 4·3위령탑에 새겨진 토산리 희생자 명단.
서귀포시 표선면 4·3위령탑에 새겨진 토산리 희생자 명단.

▲18세~40세 사이의 남자와 20세 전후의 여자 157명 희생

토산 마을에서의 4·3 비극의 시작은 1948년 12월 12일부터였다. 10월에 내린 소개령에 의해 해안에서 5㎞ 이상 떨어진 마을 온 동네가 불에 타고 주민들이 해안가 마을로 이주를 할 때도 토산은 그 대상에서 제외됐다. 알토산이 해안마을이었고, 웃토산 마을도 기껏해야 해안에서 2킬로 남짓한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불안한 날들이 지속되는 가운데, 뜬금없는 명령이 내려졌다. 웃토산 사람들 모두 알토산으로 이주하라는 것이었다. 이웃 마을에서의 여러 학살 소식을 접한 토산 사람들은 누구의 명령이라고 거역하겠는가. 사람들은 생활의 터전을 모두 그대로 두고 알토산으로 이주를 했다. 친척 집이나 지인의 집을 찾아, 헛간이나 마굿간도 마다하지 않고 기거를 했다. 제주가 아무리 따뜻하다고 해도 겨울인 12월이었다. 

알토산으로 내려간 지 이틀 만에 군인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알토산 향사 앞마당으로 모이라고 했다. 군인들은 빠져 있는 사람들이 있을까 해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끌고 왔다. 그리고 18세 이상 40세까지의 남자들을 따로 불러내어 표선면사무소로 끌고 갔다. 

그리고 군인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던 여자들에게는 ‘달을 쳐다보라’고 했다. 보름을 앞둔 열사흘 달은 휘영청 밝았다. 고개를 든 사람들의 얼굴이 달빛에 뚜렷이 드러났다. 군인들은 달빛에 드러난 여자들 중 스무 살 전후의 얼굴 반반하게 보이는 여자들을 골라 차에 태웠다. 

표선국민학교로 끌려간 사람들 중 남자는 18일과 19일 양일에 걸쳐 표선 ‘한모살’에서 처형됐다. 아무런 이유도 없는 죽음이었다. 따로 끌려간 여자들은 일주일쯤 후에 처형됐다.

일주일 동안 그녀들이 어디서 무얼 했는지는 아직 정확하게 밝혀진 게 없다. 그러나 우리는 충분히 짐작된다. 남자들의 집단인 군대 안에서 그녀들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이었는지를. 무지한 폭력 앞에 가장 먼저 약탈당하는 것은 힘없고 가여운 존재, 바로 여자들이었다. 

서귀포시 표선면 4·3위령탑. 위령탑은 4·3으로 희생된 영령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서귀포시 표선면 4·3위령탑. 위령탑은 4·3으로 희생된 영령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음력 11월 17일과 18일, 그 이틀간의 이야기

지금도 토산은 음력 11월 17일과 18일 이틀에 걸쳐 거의 모든 집이 제사를 지낸다. 어떤 집은 하룻밤에 두세 번의 제사를 지내는 집도 있다. 명절처럼 지내는 제사가 반복될수록, 그날의 공포와 불안, 억울함, 아픔들은 조금씩 무디어 갔다.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에 박혀 있는 응어리는 절대 풀 수 없는 것이었다. 왜 그랬을까. 왜 그런 죽음이 자행됐을까. 이유를 알 수 없었던 죽음에 대한 해석이 분분했지만, 어느 것 하나 정확히 내려온 사연은 없었다. 그냥 다 바람에 날리는 것들이었다. 

필자의 집에서도 음력 11월 17일이 오면 할아버지 제사를 지냈다. 양자를 가신 말젯아버지(숙부)도 작은할아버지 제사를 따로 지냈다. 아무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할아버지와 할아버지 남동생이 4·3 때 표선 백사장에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은연중에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젠, 누구든지 4·3에 대해 이야기를 해도 되는 시절이 됐지만, 오래전 그날 제사를 지내는 이유에 대해서 그 누구도 알려고도 알리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심전심으로 느낄 뿐이었다. 

어느 날 우연히 펼쳐본 경주김씨 족보에는 할아버지와 할아버지 남동생, 그리고 아직 어렸던 할아버지 여동생의 죽음이 기록돼 있었다. ‘저 달을 봐라’ 손가락 끝에 걸렸던 목숨 한 조각이 바로 나의 고모할머니였던 것이다. 

그러나 할아버지 두 분과 할머니의 죽음을 말해줄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무심하게 시간을 보내는 사이, 난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시간 속으로 흘려버리고 만 것이다. 

▲오늘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우리

아픈 만큼 더 성숙해진다는 명제는 참이다. 아픔의 시간을 건너는 동안 우린 더 성숙해졌고, 더 단단해졌다. 토산리에서의 1500여 년의 역사를 이어오는 동안 망오름과 송천은 변함없이 마을과 주민을 지켜줬다. 또한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전설들과 사람들의 이야기는 다시 또 천년 이천년을 이어갈 것이다. 그 무수한 시간과 이야기 속에 한 점으로 있는 나, 그리고 우리는 오늘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주체인 걸 새삼 이 (연재)글을 통해 알게 됐다.

(글·사진=김연미 토산리 출신 질토래비 전문위원)

※토산리에 깃든 역사문화 편을 총 6회에 걸쳐 마무리하고, 다음 회부터 성산읍 수산리에 깃든 역사문화에 대해 연재합니다. 
본 연재에 관심 있는 마을 또는 개인은 ㈔질토래비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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