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따라 걸으니 역사의 중심에 닿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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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 탐라·동도·정의현 역사문화 깃든 길

수산진성 원형 남아 있는 1리와 산간마을인 2리로 이뤄진 ‘수산’
벌라리왓 유적지·정의현성 등 탐방하며 마을의 역사문화 공유
활처럼 보이는 궁대오름에서 바라본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리 풍경.
활처럼 보이는 궁대오름에서 바라본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리 풍경.

▲제주역사문화의 중심마을 성산읍 수산리

선사시대부터 최근세까지 제주의 주요 역사문화들을 품고 있는 마을이 수산리이다. 그러기에 수산리를 제주 역사문화의 중심마을이라 칭해본다. 

수산리는 제주의 9진 중 가장 오래전에 지어진 수산진성의 원형이 더러 남아 있는 아랫마을 1리와 제주 역사문화의 여러 층위가 깃들어 있는 산간마을인 2리로 이뤄진 촌락이다. 예전의 성산포 지경 역시 수산리에 속했다. 성산일출봉 동남쪽 해안을 지금도 수마포(輸馬浦)라 부른다. 제주어로 수뫼밑(밋)이라 부르는 수마포는 1276년부터 수산평에서 기르던 마소 등이 몽골 등지로 오가던 역사와 관련이 깊다. 제주어 수뫼밑은 함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수뫼’는 ‘일출봉 아래에 있는 포구’라는 뜻과 ‘수산리의 포구’라는 의미로도 읽힌다. 

수산진성 서쪽 해자가 있던 자리.
수산진성 서쪽 해자가 있던 자리.

옛 문헌에 등장하는 수산포는 지금의 오조리 포구이다. 지금의 고성리에 포함된 수산봉이란 지명도 수산리와 관계가 깊다. 탐라순력도(1702)에는 지금의 고성리 일대를 수산성조(首山城操)에 포함해 그려져 있다. 이렇듯 예전의 수산은 지금의 고성리, 오조리, 신양리, 성산포 등을 포함한 광활한 지역이었다. 

▲㈔질토래비가 뽑은 수산리의 역사문화 10선

수산리에 산재한 주요 역사문화를 공유하려 ㈔질토래비에서는 지난 3월 ‘수산리가 품은 역사문화의 길’을 개장해 회원들과 함께 탐방길을 거닐었다. 당시 답사했던 수산리의 10대 명소를 연대순으로 소개한다. 

수산 벌라릿굴.
수산 벌라릿굴.

△벌라리왓 선사유적지와 벌라릿굴=수산2리의 속칭 벌라리왓 유적에서는 신석기 후기에 해당하는 토기들과 탐라시대의 곽지리식토기와 자기편 등이 발굴됐다. 벌라리왓의 지명은 함몰된 벌라릿굴에서 유래한다. 제주어 벌르다(깨뜨리다)와 벌리다(마주보다)에서 파생된 이름인 벌라릿굴이 있는 일대가 곧 벌라리왓이다. 이곳에서 출토된 토기 등이 실린 선사유적 안내판이 설치되는 소원 하나 품어본다.

△천연기념물 수산동굴=수산리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수산동굴과 비지정 둥굴인 벌라릿굴을 포함해 동굴이 8기나 있다. 가히 동굴왕국 동네이다. 도내 용암동굴 중 빌레못동굴과 만장굴에 이어 세 번째로 긴 동굴인 수산굴은 1969년 한산 부종휴에 의해 탐사됐다. 

△제주 최초의 민란인 ‘양수의 난’ 추정지=1168년 제주 최초의 민중봉기라 할 수 있는 양수의 난이 일어난 곳으로 추정(제주도교육청 ‘우리고장이야기’2014년)되는 곳이 수산2리 양수동에 있다. 
이곳은 오래전 양수라는 지명으로 불리며 사람들이 거주하다 주민들 모두 4·3 당시 아랫마을로 소개돼 지금은 밭으로 변해 있다. 그러나 이곳에 들어서면 예전의 마을 모습이 그대로 그려질 정도로 대나무 등 담장들이 더러 남아 있다. 

△제주 최초의 목장 수산평=1276년부터 원나라는 탐라목장을 수산리 넓은 들인 수산평에 조성해 말 160여 필과 목호들을 배치했다.
 제주역사에 등장하는 최초의 목장인 탐라목장을 관리하기 위해 원은 아막(阿幕)을 설치했다. 아막은 목장운영의 본부이자 목호들의 거주지이다. 동아막을 1277년 수산평에, 서아막은 다음 해에 차귀, 즉 한경면 고산리 해안지역에 설치했다. 

△제주 최고의 탐라목장 잣성=목장지대와 경작지와 거주지 경계지점에 쌓았던 잣성이 그 모습을 서서히 드러내고 있다. 덤불 속에 숨어 있는 6㎞ 정도의 잣성은, 제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긴 잣성으로 추정된다. 

△성산읍 유일의 수산곶자왈과 곶앞마을·동박낭가름 터=탐라목장 잣성 서북쪽에는 경작지와 주거지 터가 있고, 그곳 일대에는 대나무 숲이 길게 이어지고, 대나무 숲 너머로는 백약이 오름 곶자왈이 펼쳐진다. 백약이 오름 곶자왈이 성산읍 유일의 수산리 곶자왈이다. 그곳 어딘 가에는 곶자왈에서 구한 나무들로 숯을 굽던 가마터도 있다. 
특히 곶자왈 앞에 위치한 마을이라 해 ‘곶앞(고잡)’이라 불렸던 마을에는, 4·3 직전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이곳에서 바다 쪽으로 1㎞ 지점에도 수산리 설촌이 시작됐다는 ‘동박낭가름’이 있었다. 각각 50호 이상이 살던 곶앞·동박낭 마을에도 휘몰아친 4·3 광풍으로 전 주민은 아랫마을로 내려가야 했다. 이곳에서 우리는 아직 잃어버린 마을임을 알리는 표지석을 만나지 못했다.

△궁대오름 생태공원=활처럼 보인다 해 궁대오름으로 불리는 오름이 있어, 수산리 풍광이 더욱 돋보인다. 궁대오름에서 보는 옛 탐라목장 터와 제주바다와 일출봉이 한 폭의 풍경화 같다. 궁대오름 주변에는 또한 조류보호협회에서 운영하는 제주자연생태공원도 있다. 제주의 하늘을 날다 상처 입은 조류들이 이곳에서 치료받고 있다. 

수산한못.
수산한못.

△목축문화의 명소 수산한못=수산리의 깊은 역사를 모를 적에는 수상한 못인지 수산한 못인지 헷갈리기도 했던 지명이다. 이 못이 몽골의 제주도 지배 때부터 있었던 큰 못인 대지(大池)이다. 
탐라목장 이후 최근세까지 마소에게 물을 먹였던 수산한못을 복원해 목축문화의 명소로 가꾸고 있는 수산리가 자랑스럽고 고맙다. 그곳에 가면 마음이 평온해진다. 넓은 수산평을 휘둘러 볼 수도, 오래된 제주역사와 함께 목축문화를 그려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수산에 세워진 최초의 정의현성=1416년 제주목과 정의현·대정현 삼읍으로 나뉠 때, 정의현청은 당시 수산(首山·현재의 고성리) 지경에 뒀다. 그러나 수산은 현청 소재지로 오래 가지 못했다. 당시 수산리에 있던 정의현성은 지금으로부터 꼭 600년 전인 1423년 지금의 성읍으로 옮겨갔다. 그 후 최초의 정의현성이 있던 수산리 지경은, 옛 성이 있던 마을이라 해 고성(古城)이라 불리게 됐다. 이러한 역사를 담은 그림이 탐라순력도 수산성조(首山城操)이다. 

진안할망당.
진안할망당.

△최고의 수산진성=제주의 9진성 중 가장 이른 1439년 지어진 수산진성은, 일부라도 원형이 보존되기론 제주 최고이다. 또한 도내에서 유일하게 진성 안에 ‘진안할망당’이라는 당도 있다. 마을에서 할망당으로 가는 골목이 참으로 가슴 저미게 한다. 당시 선인들의 종교관을 엿볼 수 있는 순례길이 바로 이 길이다. 
이외에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수산본향당과 오래된 비석들인 황구하 어사, 윤구동 목사, 홍달한 정려비를 비롯한 여러 역사문화 관련된 유물유적이 산재된 곳이 또한 수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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