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 숙인 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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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봉, 수필가·시인

봄바람에 남실대는 초록 물결이 아름다웠다. 하늘 향해 꼿꼿이 머리를 내민 이삭이 아양 떠는 아이 같았다. 4월엔 가끔 하날 뚝 따서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비벼보면 여물이 없다. 새들도 그걸 아는지 허공만 맴돈다. 이삭만 흉내 낸 속 빈 강정이라며 웃었다.

5월이다. 황금빛으로 변해가는 보리밭, 제법 고갤 숙이는 저것들, 참새, 꿩, 비둘기가 날아와 배부르게 먹고 둥지를 틀면서 야단이다.

해마다 2000여 평의 토지에 맥주보리를 파종한다. 전통음식 교육농장을 운영하는 우리 부부에겐 소중한 재료다. 엿기름을 놓고 가루를 내어 자연 단맛을 추출하니 저것들이 뿌득할 밖에.

맥주보리는 쌀보리와 달리 여물면 고갤 숙인다. 덜 익은 것, 새가 쪼아 먹거나 병든 것은 가벼워지니 고갤 숙이지 않는다. 얼마만큼 숙였는가에 따라 수확량 차이가 확연히 다르다.

이맘때면 동아리마다 동인지 발간으로 분주해진다. 때론 편집위원이나 임원으로 손을 얹어 돕는다고 하지만 깜냥이 아니라 자책하곤 한다. 봉사하는 편집위원들 마음은 다 같을 것이다. 작가들의 글이므로 조심스럽다.

힘을 보태는 사람들이 있다. 수고한다며 간식을 사 오고 등을 도닥여 주는 사람, 대부분 필력이 오래고 작품집도 여러 권 상재하신 나이 지긋한 원로시다.

“혹시 잘못된 부분 있는지 잘 살펴봐 주시게.”

메일로 보낼 때 또는 부러 직접 전화로 부탁한다. 그런 말 한마디가 편집하면서 힘을 솟게 한다. 바쁜 삶에도 짬을 내고 잠을 덜어내며 원고를 정리하는 편집위원들에겐 영양제가 된다.

원로 작가의 글에서 잘 못된 것은 극히 드물다. 하지만 글을 쓰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오탈자가 생길 수 있다는 건 오랜 경험에서 알기 때문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을 실감할 때가 있다. 여러 번 퇴고했으나 내게는 보이지 않는 부분이 종종 생겨난다.

봉사의 의미에 허탈함을 안겨주는 사람도 있다. 교정 위원이 발견한 오류를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도 꽤 있다. 작가의 자존심이라며 이해는 하지만 사람은 평생 배운다고 했듯이 문학에 완벽이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작가의 글은 잘못된 부분이 더 보임은 무슨 조화일까.

교육 자료집을 만들 때였다. 원고를 고칠 수 없게 pdf 파일로 변환하여 제출한 회원이 있었다. 그 분야에 해박한 사람이다. 하지만 전문 용어를 삽입한 것 외는 문법, 정서법, 조사 사용도 엉망이라 편집위원들이 난감했었다.

학창 시절에 교지를 만들면서 시작한 편집위원 봉사다. 서예도록, 개인 집 발간, 동인지를 만들 때 함께 하다 보니 손을 얹은 게 100여 권이 되었다. 실력은 모자라지만 꼼꼼하다는 평을 들으며 불려 다녔다.

“내 글 손대지 마세요.”하는 전화를 받았던 일, 교정을 원치 않는다는 메시지를 받고 나서 맥이 풀리기도 했었다.

‘꼿꼿이 고개 쳐든 저 보리처럼 가벼워 보이지 않으려면 겸손히 받아들이는 자세를 가져야지.’하며 살다 보니 악평이 더 고맙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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