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산 대왕산 등 자연이 만든 마을 곳곳 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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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 탐라·동도·정의현 역사문화 깃든 길

동굴·오름·못 많은 중산간 마을
물 가두는 동네 ‘水山리’로 불려
산세 웅장한 대왕산·벌라릿굴 등
옛 문화 엿볼 수 있는 명소 존재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리에 위치한 대왕산에서 바라본 은달이오름과 전이미오름. 맨 끝에 보이는 오름은 다랑쉬오름이다.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리에 위치한 대왕산에서 바라본 은달이오름과 전이미오름. 맨 끝에 보이는 오름은 다랑쉬오름이다.

▲동굴과 오름 가름 수산 마을 이름의 변천사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리(1·2리)는 한라산 동녘 기슭 넓은 평야지대에 위치한 중산간 마을이다. 특히 제주도의 160여 동굴 중 수산굴·누루못굴·벌라릿굴 등 8기가 모여 있는 동굴 가름이다. 또한 대왕산·낭끼오름·궁대오름 등 5기가 마을 도처에 산재한 오름 가름이다. 게다가 연못과 습지 27곳이 있던 못 가름이기도 하다. 이렇듯 동굴·오름·못이 많은 수산리는 마을 곳곳에 형성된 암반지대에 물을 가두는 동네의 의미를 담아 수산(水山)리로 불려온 것으로 여겨진다. 

제주의 여러 역사서에는 수산리 지명이 비중 있게 등장하는데, 한자로는 ‘水山’ 또는 ‘首山’으로 기록돼 있다. 세종실록(1439)에는 水山·水山所, 신증동국여지승람(1530)과 탐라지(1653)에는 首山城·首山坪, 탐라순력도(1702)에는 首山城操·首山望·舊首山, 탐라지도(1709)에는 首山村·首山峰으로 적혀 있다. 또한 수산1리는 18세기 이후 하수산(下水山)·산양(山陽), 20세기 초에는 한때 수월(水月)리로 쓰이다가 다시 수산리라 했다. 

수산2리는 일찍부터 곶앞(고잡)을이라 하여 화전촌(花前村)으로, 18세기 이후에는 산양(山陽)·상수산(上水山)·화남(花南)리로 불려오다가, 1914년 수산리와 성읍 일부를 병합하여 수산리로, 1950년대 초 수산1리·수산2리로 불리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산1리 표지석에는 ‘首山에서 水山’으로 변경된 사유를 다음과 같이 새겨놓고 있다. 
‘괴수자백(魁首自白)이란 뜻인 首는 오래전부터 선비마을이자 양(반)촌으로 알려진 마을에 적합하지 않아 인산지수(仁山智水)의 뜻을 담은 水로 하여 수산(水山)으로 개명하였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수산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수산굴.

▲명산 대왕산에서 옛 수산평과 탐라목장을 그려보다

이름이 너무 거창한 대왕산(1431번지, 표고 156m)을 두어 번 찾았다. 접근하기 어려워 보이는 그곳을 본 리(里) 출신 고보진님(1951년생)의 도움으로 보다 쉽게 찾아갈 수 있었다. 대왕산은 비좁은 길과 계곡을 따라가는 한적한 지역에 위치하고 있어 방문하기가 꽤 불편하다. 최근 조성된 등정 길을 찾아 올라야 보다 편하게 정상에 오늘 수 있다. 

고진감래의 길과 같다고나 할까. 산세가 웅장하게 펼쳐진 대왕산에 올라 반월형의 정상에 서면 옛 정의현 지역이, 그보다 먼저 조성된 탐라목장의 수산평도 한눈에 들어온다. 조선시대 들어와 10소장과 산마장을 채우던 말 떼가 풀 뜯는 어슴푸레한 풍경 속에, 멀리는 백록담과 다랑쉬 오름이, 가까이로는 일출봉과 수산봉이 또렷하게 다가온다. 

특히 남쪽 인근지역 일직선상에 위치한 두 개의 오름이 유독 눈길을 끈다. 바로 은월봉과 전이미오름이다. 일직선상에 위치한 세 오름 사이에서 선인들은 王(임금왕)자 지형이 저절로 그려져 대왕산을 오름명으로 삼았으리라 여겨진다. 

오름의 형세가 王자 모양으로 생겨서 대왕산(왕뫼·왕메·왕미)으로 불렸다는 설과 함께, 또 하나의 이야기가 전해 온다. 원나라 시절 탐라총관부의 수장인 몽고의 다루가치(몽골제국에서 파견된 정복지의 총독 또는 지방장관으로 사용된 직명)가 수산평에서 키우는 말들을 감시하고 호령했던 높은 산이라 해 대왕산이라 불렀다는 이야기이다. 이 설에 더해 대왕산 인근에는 소왕산과 왕자골(동)이라는 곳도 있다. 또한 대왕산은 탐라목장에 위치한 오름들 중 산세가 가장 수려하고 풍수지리로도 음혈이 가장 많은 곳이란다. 그래서인지, 증보탐라지(1765) 등에도 대왕산(大王山), 제주군읍지(1899) 등에는 왕이산(王伊山)으로 표기돼 있다

수산 벌라릿굴.
수산 벌라릿굴.

▲대로변에 숨어 마주 보는 벌라릿굴

벌라릿굴 가는 길은 옛 수산평을 가로질러 가는 길이기에 탐라의 목축문화를 엿보는 길이고 시공(時空)과 대화하는 길이다. 게다가 옛 탐라목장 지대에 들어선 풍차들이 목가적 풍경을 더하는 길이다. 제주시와 성산포를 잇는 금백조로를 따라가다 보면, 백약이오름을 지나 궁대오름 가까이 이를 즈음 수산2리 이정표와 함께 회전 교차로가 나타난다. 이어 성산포 방향의 큰길을 따라 곧장 달리면 이내 평야지대가 펼쳐지고, 우측 한 길가에 돛단배 모양의 2층 구조물이 보인다. 그곳이 바로 선사유적지인 벌라리왓(4083번지) 일대이다. 그리고 그 근처에 벌라릿굴이 숨어 있다.

벌라리왓 주차장 남쪽에 위치한 한적한 숲으로 내려서면, 70여 m 거리를 두고 마주 보는 2기의 동굴 입구와 계곡 속에 조성된 아담한 정원이 나타난다. 1㎞가 넘는 벌라릿굴을 단편적으로나마 둘러볼 수는 이곳은 지하세계를 가로질러 내려온 용암동굴 일부가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해 무너진 함몰 지역이다. 

제주어 ‘벌르다(깨뜨리다)’는 함몰의 의미이고, ‘벌리다’라는 양쪽이 적당한 거리에 위치해 있다는 말이다. 이렇듯 벌라릿굴이란 이름은 함몰 지형 사이로 2개의 굴이 마주보고 있음에서 유래된 듯하다. 대로변에 숨어 있는 벌라릿굴을 만난 것은 ㈔질토래비에게 주어진 행운이고 벅찬 감동이다. 
굴 내부는 무너진 지 오래돼서인지 외부에서 유입된 점토가 두텁게 퇴적돼 있다. 용암종유·용암유석·동굴산호 등의 동굴 생성물들과 아아용암·용암선반·용암폭포 등을 관찰할 수 있는 벌라릿굴은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한다. 이 굴은 4·3 당시에는 수산리 주민들의 피난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한다. 벌러릿굴에서 500여 m 떨어진 남쪽에도 ‘알벌라릿굴’이라는 이름의 벌라릿굴 남쪽 입구가 있다 한다. 

기대치 않은 곳에서 만난 벌라릿굴을 둘러본 이들은 곧잘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 대로변에 숨어 있는 대형동굴인 벌라릿굴 2개의 입구를 보고 놀라고, 중산간 지대에 출현한 돛단배 형태의 구조물을 보고 의아해한다. 

벌라릿굴 주변 일대를 사적 공원화하는 데 앞장섰던 당시의 수산2리 양만길 이장에 의하면, 바다를 내려다보고 또한 선사유적지와 벌라릿굴이 있는 이곳에서 ‘제주에서 세계로’ 오가는 탐험의 과거사와 미래사를 그려보려 돛단배 모형의 안내소를 지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1274년과 1281년 2차에 걸쳐 일본원정에 참여한 원제국 연합전함들 중 일부는 이곳에서 자라던 나무들로 만들어지기도 했을 것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삼별초가 입도하기 전인 1268년 원나라는 탐라에 전함 100척을 건조하도록 압력을 가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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