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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 사업가 채몽인

진택주, 독립운동가…혁우동맹 통한 항일운동
채몽인, 애경유지 창업…대기업 육성 기틀 다져
채순병, 만세 운동 참가…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최광식, 청년운동가…기미년 2·8독립선언 서명
서귀포시 대정읍 인성리에서 태어난 채몽인은 재경제주도장학회 초대 이사장과 재경제주도민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사진은 지난해 9월 서울제주도민회장학회가 서울 강서구에 위치한 도민회 회의실에서 제주 출신 대학생 27명에게 장학금을 전달한 모습. 서울제주도민회장학회는 1968년 채몽인 이사장 등 33명 주도로 장학기금을 모아 재경제주장학회로 출범했다.
서귀포시 대정읍 인성리에서 태어난 채몽인은 재경제주도장학회 초대 이사장과 재경제주도민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사진은 지난해 9월 서울제주도민회장학회가 서울 강서구에 위치한 도민회 회의실에서 제주 출신 대학생 27명에게 장학금을 전달한 모습. 서울제주도민회장학회는 1968년 채몽인 이사장 등 33명 주도로 장학기금을 모아 재경제주장학회로 출범했다.

▲진택주秦宅周:1910(융희4)~?, 독립운동가. 혁우동맹을 통해 항일 활동, 중문면 상예리(웃-열리) 태생으로 중문(중-물)에서 잡화상을 운영하고 있었다. 
김한정(金漢貞·가파)의 지도를 받으며 청년운동과 항일운동을 했다. 그는 1933년 2월 28일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따라서 제주야체이카 재건을 추진하던 중 1932년 1월 구좌읍 동부지구에서 해녀 항일운동이 일어나면서 혁우동맹(革友同盟)의 실체가 탄로나 동년 3월 동지들과 함께 체포됐다. 

채몽인

▲채몽인蔡夢印:1912(일제강점기)~1970, 사업가. 본관은 평강. 대정읍 인성리(대정-골)에서 군수 채구석(蔡龜錫)의 아들로 태어났다. 
채몽인은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의 명성(明星)상업학교를 졸업했다. 

사업에 수완을 보여 대륭산업(大隆産業) 사장, 동남해운(東南海運) 사장 등을 거쳐 애경유지(愛敬油脂)를 창업, 대기업 육성에 기틀을 다졌다. 
채몽인은 사냥·수영 등에 취미를 갖고, 또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상호를 애경(愛敬)이라고 명명한 것도 천주교의 ‘경천애인(敬天愛人)’이란 말을 축약한 것이라고 한다. 
말년에는 재경(在京) 제주도장학회 이사장을, 또 재경제주도민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체순병
체순병

▲채순병蔡順秉:1903(광무7)~1922(일제강점기), 기미년 3·1 독립만세 당시 학생의 항일활동. 본관은 평강, 채수용(蔡洙鎔)의 아들로 제주시 일도리(제주-성안)에서 태어났다. 원적은

전남 함평(咸平)군 함평면 함평리인데 한말에 백부 채수강(蔡洙康)이 본도 정의군수로 부임할 때 채수용도 함께 제주로 이적했다. 
1920년 2월 27일 경성 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미결기간을 포함해 1년 3개월이나 옥고를 치렀다. 

채순병은 동년 11월 6일 경성지법에서 징역 10월을 선고받아 불복 항소, 1922년 학업을 계속하려고 도일(渡日) 요시찰인(要視察人)으로 지목돼 일본 경시청(警視廳)의 감시와 미행을 받기가 일쑤였으며 요절(夭折)했다. 

정부에서는 1990년 광복절을 기해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수감 중 1920년 5월 14일 가출옥(假出獄)하자 전남 강진에 사는 양부 채수강 댁에서 휴양하게 됐다. 

부친 채수용은 민족주의자로서 1926년 제주공립농업학교 항일 동맹휴학 당시에 장용견(張容堅), 홍순녕(洪淳寧)과 함께 맹휴(盟休) 수습 실행위원으로 뽑혀 문제를 해결했다. 
1919년 당시 서울 안국동 박태병 댁에서 하숙, 사립 국어보급학관 고등과 학생으로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했다. 

동년 3월 4일 밤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하려고 자기 하숙방에서 “내일 오전 8시 30분 남대문역 역전에서 제2차 독립 만세운동이 개최되니 태극기를 가지고 나오라”는 내용의 격문 약 400매를 만들어 동지 3명과 함께 각 동에 배포했다. 

다음 날 남대문 역전에 모인 수백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조선독립’이라고 쓴 깃발을 휘날리며 시위행진을 벌이다가 매일신보사 앞에서 일경에 체포됐다. 당시 제주 출신으로 서울의 만세운동에 참가한 학생은 채순병을 비롯해 경성보고 2년생 박규훈(朴圭壎)과 동교 4년생 김성숙(金成淑), 그리고 경성여고보(京城女高普)의 여학생 최정숙(崔貞淑) 등이었다.

최광식
최광식

▲최광식崔光植:1895(고종32)~1957, 도쿄에서 2·8독립선언 대표의 한 사람, 청년운동가, 제주농업중학교 교장, 본관 탐진, 초명은 남식(南植), 호는 아석(亞石). 
해방 이후 초대 제주지방법원을 지낸 우석(友石) 최원순(崔元淳)의 장남으로 제주시 이도동(제주-성안) 남문밧 ‘독직-골’에서 태어났고 초대 제주도교육감을 지낸 최정숙崔貞淑(여)의 오라버니다. 

1949년 4월 6년제의 제주농업중학교 제4대 교장에 피명됐다. 제주시의회 의장 등 역임하고 1957년 11월 27일 향년 62세에 급서(急逝)했다. 

1913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 2학년 때 인천상업학교에 편입해 1918년 일본 도쿄에 유학해 이듬해 메이지(明治)대학 재학 중에 이광수(李光洙) 등이 주도하는 기미년 2·8독립선언에 서명해 항일운동에 참여한 유일의 제주학생이다. 

이 일로 얼마 뒤에 기미 3·1독립운동이 전국적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났다. 이런 영향으로 서울 진명여학교에 다니던 누이 최정숙이 기미 3·1운동에 참가했던 것이다. 

아석은 후일 은행원으로 근무하고 1945년 해방을 맞이해 건국운동에 분주했다. 1945년 9월 10일 도내 읍면 대표 100여 명이 제주농업학교 강당에서 건준(建準) 제주도위원회를 조직할 때 위원장에 오대진(吳大進·모슬포)을 뽑고 부위원장에 그를 선출했다. 
민족주의자로서 좌경화되는 건준을 보고 실망해 도남동 ‘독짓-골’의 박대신(朴大臣)과원 4만여 평(현 도남초등학교 일대)에 농부 30여 가구를 살리며 혼탁한 사회와 이합집산의 정치 현실에 일정한 거리를 두려고 했다. 

이 과수원 터와 별장 및 농부들의 가옥은 전부 1948년 4·3사건이 터지자 불순분자의 은익처가 된다고 해 제2연대에 의해 소각시켰다. 
이에 앞서 1947년 11월 5일 하오 3시에 제주읍사무소 회의실에서 사단법인 조선민족청년단 제주도단부 발기위원회를 개최해 위원장에 최광식을, 부위원장에 문봉택(文奉澤)과 오광해(吳光海)를 선출했다. 

1950년 6·25전쟁으로 학교는 신병훈련소가 되고 4학년 이상의 학생들은 모두 해병대 4기생으로 지원하는 급변사태에 잘 대응했다. 
그러나 인민군환영준비위원회라는 모략을 받아 그의 부친과 제주유지 12명이 구금돼 박해를 받는 위기에 처하자 고통의 세월을 보냈다. 
중앙에서 조사단장 선우종원(鮮于宗源)이 내도해 이 사건은 무고사건임을 밝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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