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인이 남긴 역사를 찾아 나서다
선사인이 남긴 역사를 찾아 나서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174) 탐라·동도·정의현 역사문화 깃든 길

중산간 평탄지대 위치한 벌라리왓
3차례 발굴조사로 선사유물 발견
부종휴, 꼬마탐험대와 만장굴 알려
수산동굴·빌레못굴 등 탐사하기도
벌라리왓 선사유적지 발굴 장면. 이곳에서 삼각점렬문토기, 조흔문토기 적갈색경질토기 등 유물이 발견됐다.(사진=제주대학교 박물관 제공)
벌라리왓 선사유적지 발굴 장면. 이곳에서 삼각점렬문토기, 조흔문토기 적갈색경질토기 등 유물이 발견됐다.(사진=제주대학교 박물관 제공)

▲수산리 선사유적지 벌라리왓
벌라릿굴(벌라리궤)이 있는 주변 밭이 벌라리왓이다. 한때나마 벌라리왓에서 거주하던 선사인들은 외부의 침입 등 생존을 위해 벌라릿굴을 이용하기도 했을 것이다. 

철기시대인 탐라전기에 해당하는 기원 전후 2~3세기경 제주에서는 해안지대에 발달한 하천과 용천수 부근의 비옥한 곳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된다. 그러나 수산리 벌라리왓 유적은 해안지대가 아닌 중산간 전망 좋은 평탄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벌라리왓 선사유적지(수산리 4,097-1 일대)는 2001년 수산2리와 좌보미 사이를 잇는 도로 확장·포장 공사 당시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재연구소에서 시행한 지표조사(길이 160, 너비 15m)에서 처음 확인된다. 

2002년에도 제주문화예술재단 문화재연구소에서 시굴조사를 실시해 유적의 분포 범위, 주혈 및 일부 소토유구(燒土遺構: 불을 피운 토목건축 등의 구조를 엿볼 수 있는 구조물 흔적), 점렬문토기, 적갈색경질토기 등의 유물이 확인된다. 2003년 조사에서는 현무암 암반이 넓게 노출된 지표면에서 총 23개의 유구와 점열문토기와 적갈색토기 등이 재확인된다.
3차례의 발굴조사로 벌라리왓 유적에서는 신석기 후기에 해당하는 삼각점렬문토기, 조흔문토기, 적갈색경질토기, 석착, 갈돌, 지석, 탐라시대의 곽지리식토기, 자기편 등이 발굴된다. 

이렇게 소중한 선사유적유물들이 발굴된 이곳에는 이를 알리는 안내판이나 표석이 아직은 세워져 있지 않다. 이곳은 전문가 집단만이 알뿐 일반인들은 그 가치를 알 수 없는 그래서 공유할 수 없는 무명의 지대로 남아 있는 선사유적지이다. 이곳에서의 출토과정과 관련된 사진과 유물에 대한 안내의 글 등이 당국에 의해 전시되고 게시될 때 이곳의 가치도 또한 커질 것이다. 

제주문화예술재단이 2006년 발행한 ‘벌라릿굴 유적 발굴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일반적인 주거지가 확인되지 않는 점으로 보아 벌라리왓 선사유적지는 어떤 특수한 상황으로 형성된 일시적인 거주지로 판단된다고 기술하고 있다. 

수산동굴을 알린 최초의 제보자와 관련한 제남신문 기사. (자료=한석중 박사 제공)
수산동굴을 알린 최초의 제보자와 관련한 제남신문 기사. (자료=한석중 박사 제공)

▲미지의 수산동굴 관련 최초 신문 기사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는 수산동굴(4003-1번지)의 유일한 입구는 지금 철책으로 막혀 있다. ‘그 먼 길을 물어왔는데…’하고 발길을 돌리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굴 내부를 조금은 들여다보고 안내판에 그려진 사방팔방으로 뻗은 가지 굴 등을 보며 미지의 지하세계를 그려보는 것으로도 위안이 됨직은 하다. 

총 길이 5.520m의 3층 구조로 된 동굴 안에는 용암다리와 가지 굴, 그리고 종유석·석주·석순·산호 등이 잘 형성돼 있다고 한다. 수산동굴을 마을에서는‘낭못굴’이라 부른다. 동굴 입구 인근에 있는 낭못에서 유래되며, 낭은 참나무의 제주어이다. 동굴이 있는 야트막한 언덕을 또한 낭못동산이라 부른다. 2021년 발간된 ‘水山里誌’에는 수산동굴을 알린 최초의 제보자와 관련한 기사가 실려 있다. 水山里誌 편찬위원장을 지낸 한석중 박사(수산1리)의 도움으로 구한 신문기사(濟南新聞: 1970년 2월 23일)에는 미지의 수산동굴을 엿볼 수 있는 내용이 있어, 이를 그대로 옮겨본다.

‘성산면 수산리 서남쪽 2㎞ 지점 속칭 차목지벌판에서 만장굴(길이 6978m) 길이에 가까운 큰 동굴이 발견되었다. 지난 20일 성산면 수산리 오남종(32·성산면사무소 근무, 수산2리)씨에 의해 발견된 이 동굴은 입구에서 서남쪽(성산면 신산리 방향)으로 약 6천미터(보측步測 및 시측時測에 의한 추정)나 뻗어있으며 반대 방향인 동북쪽으로도 약 7백미터나 뚫려있다. 
입구는 한 사람이 내려갈 수 있을 정도의 원형으로 되어있고 바닥까지는 약 15미터나 되어 밧줄을 타고 내려가야 하며 굴 바닥은 지금까지 발견된 도내의 동굴과는 달리 포장로처럼 평평한 돌바닥으로 되어 있고 천정은 콘세트형으로 되어있다. 
높이는 15미터에서 끝 지점에는 약 90센치미터의 높이이고 나비(넓이)는 3미터에서 12미터나 되는 대형동굴이다. 굴 내부에는 입구에서부터 50미터 지점에 8평 정도의 웅덩이가 있고 그 속에 1평 정도의 나비에 30센치 깊이의 물이 고여 있다. 
또한 1천5백미터쯤 들어가면 약 12미터 높이 돌기둥이 서 있으며 3시간쯤 걸어 들어가면 낙시배 모형의 암석이 굴 한가운데 1미터 높이로 돌출되어 있다. 그리고 많은 커브와 층계를 이루면서 땅속으로 들어가며 기온은 19도(외부온도 섭씨 7도)에서 들어갈수록 차츰 낮아 마지막에는 섭씨 10도로 내려간다. 
이 굴은 지금까지 전문진에 의해 답사된 바가 없어 동식물의 서식여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벽에는 이끼가 돋아 있음을 눈으로 볼 수 있어 도내의 동굴연구나 지질연구에 큰 자료를 제시해줄 것으로 보여진다. (기사 원내는 동굴입구와 발견한 오씨)’

교육자·동굴탐험가·식물학자·산악인·사진작가 등으로 활동한 부종휴가 1970년대 촬영한 성산일출봉 주변 풍경.
교육자·동굴탐험가·식물학자·산악인·사진작가 등으로 활동한 부종휴가 1970년대 촬영한 성산일출봉 주변 풍경.

▲수산동굴과 만장굴 등을 탐험한 부종휴

제주에서는 동굴 주제로 우선 거론되는 이가 부종휴 선생이다. 수산동굴의 실체를 전해 들은 부종휴는 1970년 수산동굴 역시 탐사한다. 구좌읍 세화리 출신인 부종휴는 초년교사 시절인 1946년 김녕사굴과 만장굴 등을 먼저 탐험한다. 당시 김녕초등학교 교사였던 부종휴는 제자 30여 명으로 구성된 ‘꼬마탐험대’와 함께 1년간 5차에 걸친 답사와 측량을 통해 만장굴의 전모를 밝혀낸다. 
부종휴와 꼬마탐험대의 이야기는 유네스코 자연유산이자 제주세계지질공원 대표명소인 만장굴을 세상에 알린 최초의 역사이다. 이들의 동굴 탐험은 세계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 힘든 쾌거로 알려져 있다. 

1970년 수산동굴에 이어 1971년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동굴탐사 사건이 알려진다. 길이 11.7km에 달하는 당시로서는 세계 최장의 굴인 애월읍 어음리 빌레못굴의 존재가 부종휴 등에 의해 전격적으로 발표된 것이다. 이에 더해 한라산우회 등과 함께 빌레못동굴에 대한 9회의 탐험을 통한 구석기시대 유물과 황곰뼈 등의 발견으로 고고학계에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다채로운 경력의 소유자인 부종휴는 이후에도 교육자·동굴탐험가·식물학자·산악인·사진작가 등으로 활동하며 제주의 숨겨진 가치를 발굴하는데 발 벗고 나선다. 
한라산 정상을 365회나 오르며 새로운 식물 333종을 밝혀내기도 했던 부종휴는 만장굴에서 세기의(?) 결혼식을 거행했으며, 이로 인해 만장굴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