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깃든 지명…선인의 기억으로 전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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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 탐라·동도·정의현 역사문화 깃든 길-수산리

엄격한 사료보다 전래된 지명 많아
성밖내서 선반내로 유추할 수 있어
양수의 난 추정지 수산리 양수동
두 갈래 물 흘러 兩水라 전해지기도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2리 양수의 난 의거 추정지를 둘러보는 질토래비 회원들.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2리 양수의 난 의거 추정지를 둘러보는 질토래비 회원들.

▲제주 도처 지명에 실린 역사문화 찾아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카(E·H Carr)는 ‘역사란 무엇인가’란 책에서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했다. 엄격한 사료 중심의 실증주의 역사관과 연구자 중심의 주관주의 역사관 모두를 비판하면서 한 말이다. 제주에는 엄격한 사료에 해당하는 오래된 기록은 적은 편이나, 역사문화가 깃든 지명은 적지 않은 편이다. 제주 도처의 지명 중 대표적인 사례 몇을 찾아보자. 

서귀포시 걸매공원과 제주시 무근성 근처에는 ‘선반내’라는 지명이 있다. 이곳은 선반과 같은 지형과는 관계가 없어 보인다. 반면 선반내 근처에는 제주시에는 무근성과 병문천이, 서귀포에는 서귀진성과 홍로천이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유추해본다면, 성 밖을 흐르는 내의 뜻을 지닌 ‘성밖내’가 수백 년 동안 음이 변천하며 선반내로 불려왔으리라 여겨진다. 
제주에는 당캐(포)로 불리는 지역도 몇 있다. 할망당이 있는 포구라는 뜻으로 불려지는 당캐(堂浦)는 표선리와 추자도에도 있다. 반면 안덕면 대평포구의 옛 이름은 당나라와 교역을 했다는 의미를 담은 당포(唐浦)로 전래되고 있다. 탐라순력도(1702)와 대동여지도(1861)에도 대평포구를 唐浦로 표시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보아 이 포구를 통해 제주말(馬)들이 국내외로 실려 나갔음을 짐작케 한다. 이를 뒷받침하듯 말들이 당포로 향했던 길이 올레꾼들이 다니고 있는 말길인 ‘공마로(貢馬路)’이다. 

한림읍 옹포리에는 ‘마대기빌레’라는 지명도 있다. 제6소장 등에서 기르던 말들은 순풍이 불 때까지 옹포리 외곽에 있는 너럭바위와 곶자왈 지대인 마대기빌레에서 잡풀을 뜯으며 대기하다가 명월포(옹포)를 통해 실려 나가곤 했다. 지금은 농경지와 주택지 등으로 바뀌어 있는 마대기빌레 일대는 바위투성이 지대를 농경지로 개간한 선인들의 억척스러움과 고단한 일상이 묻어나던 삶의 현장이다. 이렇듯 예시한 지명들에 대한 엄격한(?) 사료들은 적은 편이다. 하지만 기록 못지않게 선인들의 기억에서 기억으로 전해지는 구전 역시 우리의 소중한 역사이고 문화일 것이다.

수산한못 전경.
수산한못 전경.

▲수산리 지명인 ‘양수’에서 ‘양수(良守)의 난’을 떠올리다

탐라목장의 말들이 물을 먹었던 ‘수산한못’ 아래 동네(2,011번지)에는 ‘양수’라는 지명으로 전래되는 독특한 지형이 있다. 이곳은 1168년 일어난 양수의 난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고려사 등 여러 문헌에는 탐라에서 일어난 양수의 난이 기록돼 있으나, 난의 진원지에 관한 기록은 없다. 

오래전부터 양수라는 지명으로 불려오다 최근에는 ‘양수동’에 속한 이 지역은 수산2리에서도 한참 떨어진 옛 탐라목장 지대에 위치해 있다. 양수라 불리는 곳 뒤에는 낭끼오름(남거봉南擧峰)이 마을을 포근히 감싸듯 둘러쳐져 있다. 제주어 낭(나무)과 끼(변두리)로 이뤄진 낭끼오름은 수산리에서도 남쪽 높은 르(등성이)에 위치하고 있다. 
오름 화구(굼부리) 안에 조성된 초지는 오래전부터 양수의 후예들이 경작한 흔적이라 여겨진다. 당시에는 제주도 도처에 들어선 중심마을마다 토호세력 주도로 마을 자치가 이뤄지기도 했을 것이다. 

수산2리 양만길 전 이장의 안내로 찾아간 그곳에는 무성한 대나무 숲들이 여기저기 들어차 있었다.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4·3 당시 중산간 소개령으로 인해 소개돼 지금은 빈 마을이 돼 있다. 안내자의 증언에 의하면 양수 일대에는 오래전부터 내려온 주거 유적들이 있었으나, 1980년대부터 밭으로 변했다 한다. 하지만 지금도 그곳 도처에는 당시의 집터와 골목길로 추정되는 담장들이 더러 남아 있기도 하다. 
한편, 큰비가 내리면 이곳에서는 두 갈래로 물이 흘렀다 하여 양수(兩水)라는 지명이 생겼다고도 전한다.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는 지난 호에 일시주거지(camping site)로 소개된 벌라리왓 선사유적지가 있다. 양수 등 봉기군들이 벌라릿굴이 있는 그곳 평탄지역에 모였던 것은 아닐는지 하고 괜한 상상도 해본다.

옛 지명이 당포인 대평포구로 향하는 공마로에서 만나는 박수기정의 절경.
옛 지명이 당포인 대평포구로 향하는 공마로에서 만나는 박수기정의 절경.

▲첫 탐라현령 최척경

기록상 첫 탐라현령인 최척경은 양수가 일으킨 봉기와 관련이 깊은 인물이다. 천년왕국 탐라는 고려와 몽고 시대를 거치며 1105년 탐라군으로, 1214년 제주군으로, 1295년 제주목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고려사 등 여러 문헌에 의하면, 고려는 탐라군을 1153년 탐라현으로 명칭변경하면서 지방관으로 현령을 파견했다. 그러나 반란조짐이 조정에 보고될 정도로 탐라에 부임한 현령들은 폭정과 착취를 일삼곤 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탐라현령으로 능력 있고 청렴한 인물을 찾았는데, 그가 곧 최척경이다. 

1162년(의종 16) 탐라에 온 최척경은 전임 현령들의 비리와 폐단들을 고치며 3년의 임기를 마치고, 아쉬워하는 백성들을 뒤로 하고 개경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3년 후인 1168년 탐라의 지배층이었던 양수 등이 과중한 조세부담과 수탈을 자행하는 지방관을 축출하기 위해 민중봉기를 일으킨다. 그리고 고려조정에는 탐라현령의 폭정에 시달려 반란이 일어났다는 비보와 함께, 탐라현령으로 최척경을 다시 보낸다면 무기를 버리겠다는 투항 조건도 전해진다. 왕명을 받은 최척경은 가족과 함께 탐라에 부임하길 청했고, 이를 허락받은 최척경은 가족을 동반한 최초의 수령이기도 하다. 

최척경이 현령으로 오자 탐라선인들은 스스로 봉기를 마무리했으나, 장두였던 양수 등 7명은 참수됐다. 다음은 고려사에 기록된 관련 대목이다. 
“탐라 안무사 조동희(趙冬犧)가 왕(의종)에게 ‘근자에 관리의 불법으로 적의 괴수 양수(良守) 등이 모반하여 수령을 축출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왕은 조동희에게 명하여 부절(符節: 신임장과 함께 사신이 가지고 다니던 돌이나 나무로 만든 물건으로 둘로 갈라, 하나는 조정에 보관하고 하나는 본인이 소지하였음)을 가지고 가서 선유케 하였는데, 난민들이 스스로 항복하자 양수 등 7명을 참하고 나머지는 곡식과 포백(布帛)을 내려서 무마하였다.”

양수의 난은 기록상 전국 최초의 민란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사건이다. 수산리 양수동에 거주한 것으로 추정되는 양수는, 백성들을 위해 장두가 된 최초의 제주인으로 기록되고 있다. 한편 양수의 난은 백성들을 등에 업은 탐라국의 주도세력과 소외된 토호세력 간의 주도권 싸움으로 일어났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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