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의 겨울을 지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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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옥, 제주장수복지연구원장/ 논설위원

어머니와 함께 산 지 20년째다. ‘아이를 돌봐주시면 공부를 더 해보겠다’는 아들을 위해 부모님은 선뜻 미국으로 떠나셨다. 2남 7녀를 키워내시고, ‘이제 살만하다’시던 60세 때 일이다. 부모가 무엇이기에. 부모란 ‘아버지와 어머니를 아우르는 말’인 동시에 ‘집에서 어린아이를 돌보아 주는 사람’이라고, 사전은 정의한다. 농부이신 아버지는 생애를 통틀어서 자녀들을 2모작으로 돌보셨다.

아버지를 미국의 공원묘지에 깊이깊이 묻던 날, 어머니는 나를 따라 한국행을 택하셨다. 미국식 매장방식이 마치 시신을 골충(깊은 골짜기)에 내버리는 것처럼 비쳐졌던 때문이다. 올해로 101세를 사시는 어머니는, 당신의 장례가 걱정이다. 삼매봉 양지바른 곳에 묻히고 싶은데, 화장이 대세다.

바야흐로 어머니는 인생의 겨울을 지나고 있다. 하루 종일 햇살이 비쳐드는 거실에 앉아서 꾸벅꾸벅 조신다. 이제야 알겠다. 김광협 시인의 ‘유자꽃 피는 마을’에서 왜 ‘툇마루 위에 유자꽃 꽃잎인 듯, 백발을 인 조모님이 조시는지’를. 어머니는 “우리 집은 남향이난 바당이 씨원허게 보이곡, 섶섬도 보름을 오고생이 막아주난, 잘도 좋다 이!”라며, 화안하게 웃는다. 그리고는 조신다. 안심이 되신 게다. 이따금 눈을 뜨면 침을 손바닥으로 훔쳐서는 소파에다 쓰윽 묻힌다. 침 흘림과의 전쟁은 치매의 전조다. 뒤이어 연하곤란(삼킴 장애)이 따른다. 밥을 떠먹이고선 ‘삼킵서’를 반복해야 한다.

어머니의 아침은 ‘이제랑 일어납서’로 시작된다. 깨우지 않으면 하루 종일이라도 계속 주무실 터다. 그 기조를 깨지 않으면 영면하시리라. 밤새 젖은 기저귀를 갈고 나서, 뜨거운 수건으로 온 몸을 닦는다. 그리고 새옷을 입혀드리면 아기처럼 웃으며 지팡이를 짚는다. 거실로 나와서 당신의 자리에 앉아 입을 여는 아침 인사, “아고게, 우리집 마당엔 송키(채소)가 하다 이!” 그러고나서, ‘바당이 잘도 씨원허다’고 하시면 운수 좋은 날이다. 그저 맥없이 주저앉아서 조신다면 일상의 전쟁이 시작된다. 입을 벌리지 않는데 무슨 수로 먹일 건가. 혈압약, 치매약 등은 어떻하고. 목이 메도록 ‘어머니’를 부르다가 부둥켜안고 울어버린 날도 있다.

어느 날 방송국에서 연락이 왔다. 서울대학교 연구에 의하면, 가족 내에서 돌봄 전담자의 85%가 여성이라면서. 어쩌다가 노인과 함께 살거나(29%), 가장 가까이 살기에(20%) 주돌봄자가 된 경우들이다. 공통점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돌봄 노동에 중독된 사람들이란 사실이다. 프로그램에서는 중독자로 지명된 주인공이 의사들로부터 진단을 받는다. 64세 주인공은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를 연이어 14년 동안 모시는 사이에 자신도 치매에 걸린 것 같다며 눈시울을 붉힌다. 의사들은 기억력을 회복할 수 있다는 약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처방한다.

경험컨대, 돌봄은 소중하지만, 혼자서는 가혹하다. 오래 가면 영혼을 갉아먹는다. 노인이 되어 노모를 모시는, 인생의 겨울을 지날 때는 몸보다 마음이 더 시리다. 삶이 얼어붙지 않으려면 온기가 필요하다. 독박 돌봄 10년에 효자는 없다. 돌봄의 겨울에는 서로의 등을 맞대고서 짐을 나눠지는 온정이 필요하다. 아, 온 동네가 60세 잔치를 같이 먹던, 그 시절의 제주도는 어디로 갔나. 장수노인께서 퐁낭 아래에 좌정하시면, 어느새 간밤의 제사떡이 차롱에 담겨 오고, 아이들이 하나 둘 모여들던 그 때를, 어머니는 자나 깨나 그리시는가 보다.


※본란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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