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야 가득한 牛馬의 모습이 그려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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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 탐라·동도·정의현 역사문화 깃든 길-수산리

탐라목장과 경작지 경계지역에 1276년 이후 쌓은 잣성 현존
원나라, 탐라목장 관리로 목장운영 본부 설치…국영목장 중 하나
옛 탐라목장의 위치는 지금의 성산읍 수산리 궁대오름 주변의 잣성을 경계로 한 동북쪽 평야지대 수백만 평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진은 탐라목장 추정지.
목호들의 경작지와 마을 추정지.

▲수산평에 들어선 탐라목장

옛 탐라목장의 위치에 대해서는 아직은 공식적인 지표조사가 이뤄지지 않은 상황이나, 지금의 궁대오름 주변의 잣성을 경계로 한 동북쪽 평야지대 수백만 평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탐라목장을 찾아가기 위해 양만길 전 이장의 안내로 수산2리 곳곳을 누볐다. 수산한못과 수산동굴 입구, 벌라리동굴과 선사유적지 등을 품고 있는 수산리는 제주 역사문화의 보고라는 생각을 하며 도처를 걷고 또 걸었다. 특히 가시덤불 속에 숨어 있는 잣성(담)을 발견하곤 탄성을 지르기도 했다. 

탐라목장과 경작지와의 경계지역에 1276년 이후 쌓은 잣성은 제주에 현존하는 잣성 중 가장 오래되고 가장 길(약 6㎞) 것이다. 물론 1270년 입도한 삼별초와 관련해 바다를 에둘러 쌓은 환해장성이 있다지만, 오늘날 그곳을 가늠하기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다만 애월읍 항파두리에 삼별초가 쌓은 15여 리 토성의 상당 부분이 복원돼 있기는 하다. 

고려가 탐라를 물 건너에 있는 고을이란 의미를 담아 1214년 제주군으로, 1295년 제주목으로 국명(지명) 명칭을 지은 것에 반해, 원은 몽골군과 다루가치(達魯花赤)를 둔 1275년(충렬왕 1) 전후해 지속적으로 제주를 탐라국으로 칭했다. 고려의 땅이 아닌 독립국 탐라를 다스린다는 점에 방점을 둔 것으로 여겨진다. 
탐라4절(의술 진국태·점술 문영후·무술 양보성)의 제일인으로 알려진 고홍진이 감교(勘校)해 이원진 목사가 편찬한 탐라지(1653)에 따르면, 원은 1276년부터 수산평에 말 160필과 노새·나귀·양들을 점차 방목하고 목호들을 배치해 탐라목장을 조성해 나갔다. 

목호들의 경작지·마을 추정지
옛 탐라목장의 위치는 지금의 성산읍 수산리 궁대오름 주변의 잣성을 경계로 한 동북쪽 평야지대 수백만 평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진은 탐라목장 추정지.

▲수산평에 동아막을, 차귀평에 서아막을 설치

원나라는 탐라목장을 관리하기 위해 아막(阿幕)을 설치했다. 아막은 목장운영의 본부이자 목호들의 거주지 등을 아우르는 용어이다. 동아막을 1277년 수산평에, 서아막은 다음 해에 차귀평(한경면 고산리 해안지역)에 설치했다. 이후 동서 아막을 통한 목장의 관리체계는 동도현과 서도현을 설치하는 기초가 됐다. 이후 말이 크게 번식해 산야에 가득했으며 사육된 말은 동아막에서는 수마포, 서아막에서는 와포(지삿개, 한경면 용수) 등을 통해 원으로 실려 갔다 전한다. 

몽골은 또한 일본 정벌을 위해 탐라 도처의 거목들을 베어 전함을 만들도록 했다. 그 후 탐라에서는 수많은 전선이 제작되고, 원시림지대는 광활한 초원으로 변화돼 갔다. 특히 동아막이 있는 수산평 지역은 여느 지역보다 목초지 개발이 일찍 이뤄지기도 했다. 그리고 담을 쌓아 농경지와 거주지와 목장을 경계 지었다. 목호들과 탐라선인들 사이 접촉이 이루어지면서 또한 통혼도 이뤄지기도 했다. 

이러한 교류의 영향으로 선인들은 몽골식 목축방식을 종래의 목축에 접목해 우마사육을 확대하기도 했을 것이다. 기온과 강수량이 목초생육에 적당해 마필이 잘 번식하자, 원나라 궁정 소속의 마필과 노새도 탐라목장에서 방목됐다 한다. 그러한 영향으로 말들이 산야에 가득했던 탐라목장은 원제국이 점령지 도처에 설치한 14개 국영목장 중 하나이기도 했다. 아막을 설치했던 장소를 수산리에서는 ‘가막자리·아막(阿幕)좌리(座里)·막짓은 자리’ 등으로 불려 온다. 탐라지(1653)에는 ‘수산평(首山坪)은 마을 서남쪽에 있다. 고려 충렬왕 때 (달로화적인) 다라치(塔剌赤) 등이 와서 이 들판에 말·소·낙타·나귀·양 등을 방목하였다.’라고 기록돼 있다. 

가시덤불로 가려진 탐라목장 잣담.
가시덤불로 가려진 탐라목장 잣담.

▲탐라국에 세운 원나라의 관부

원나라는 삼별초를 평정한 뒤 탐라국을 직할령으로 해 지방정부인 관부를 이 땅에 설치했다. 탐라에 설치한 원의 관부는 4차례에 걸쳐 개편되는데, 원이 1273년 처음 세운 관부는 ‘탐라국 초토사(耽羅國 招討司)’였다. 원제국의 초토사는 주로 연해(緣海)의 요지에 설치돼, 연해 주민의 위무나 토벌에 관한 일을 처리했다. 

1년 후인 1274년에는 초토사가 ‘탐라국 군민도달노화적(軍民都達魯花赤) 총관부’로 개편됐다. 탐라국 총관부는 원대의 지방행정인 행성(行省), 노(路), 부(府)에 설치됐던 관부로, 탐라 역시 원의 지방행정 가운데 노(路)로 지정돼 총관부가 설치됐던 것이다. 총관부에는 몽골족이 지방관(장관)인 다루가치로 부임했고, 총관에는 토호세력들이 임명됐다. 당시의 총관은 고인단(高仁旦)과 문신(文愼) 등이었다. 성주인 고인단은 삼별초가 입도할 당시 중도를 지켰다고 평가되는 인물이다. 

지총관인 문진은 문가(文家)에서의 첫 탐라왕자인 문창우의 부친이다.(1270년 토호세력인 양호에 이어 탐라부사인 문창우가 탐라왕자에 봉작된 이후 탐라왕자는 문가에서 세습됐다. 1272년 성주 고인단과 함께 왕자 문창우가 원나라를 방문해 탐라를 고려에 복속해 줄 것을 요청한 기록도 보인다.) 

제주시 애월읍 항파두리 토성.
제주시 애월읍 항파두리 토성.

총관부는 1284년 다시 ‘탐라국 안무사(安撫使)’로 개편됐다. 안무사로의 개편은 제3차 일본 정벌과 관련해 군정을 보다 강화하는 조치로 작용한 바, 이 시기에는 원군이 증파되기도 했다. 일본 정벌에 집착하던 원 황제 세조가 1294년(충렬왕 20년) 서거한 후 원으로부터 탐라를 돌려받은 고려조정은 1295년 탐라의 행정단위를 승격해 제주목으로 삼았다. 한편 성주 고인단과 왕자 문창우는 탐라의 고려환속에 기여한 공로로 충렬왕으로부터 아홀, 홍정, 모개, 화(靴) 등을 하사받기도 했다. 

5년 후인 1300년 원은 다시 탐라총관부를 설치해 원의 직할령이 되는데, 탐라목장의 말들을 원에 바치기로 한 약속을 고려가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이란다. 1301년에는 총관부가 ‘탐라군민만호부’로 개편되고, 55년 후인 1356년(공민왕 5)이 돼서야 폐쇄됐다. 

총관부가 원의 직접지휘를 받는 관할 아래 있었던 반면, 만호부는 고려왕이 장관을 겸직하는 정동행성 관할 하에 있었다. 원은 관부를 4차례 개편했으나 항상 토착세력을 관부의 관리로 기용해 탐라 경영에 참여케 했다. 이는 원제국이 흔히 구사했던 오랑캐를 빌어 오랑캐를 다스린다는 이이제이책(以夷制夷策)의 일환이기도 하다. 관부 폐지 후에도 목호는 1394년 최영 장군 군대 입도 때까지 잔류해 목마에 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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