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년 역사 흔적들이 마을 곳곳에 깃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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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 탐라·동도·정의현 역사문화 깃든 길-수산리

곶자왈 앞 여러 가름 품은 ‘곶앞’…4·3으로 인해 사라진 마을로 전해져 
고려부터 牛馬 물을 먹이던 수산한못…복원작업으로 명소로 탈바꿈
곶앞(고잡) 마을이 있었던 수산곶자왈 주변 경관. 수산곶자왈 앞에 위치한 마을이라 해 곶앞(고잡)이라 불렸다.
곶앞(고잡) 마을이 있었던 수산곶자왈 주변 경관. 수산곶자왈 앞에 위치한 마을이라 해 곶앞(고잡)이라 불렸다.

▲탐라목장 잣성과 오래된 마을 곶앞(고잡)

수산리 주변에는 산이 많다. 그중 지형이 활처럼 생긴 궁대오름 등정 초입에는 제주자연생태공원(금백조로 448)도 있다. 자연생태공원에서는 제주에서 보기 드문 독수리도 볼 수 있다. 한때 제주 하늘을 날아다니다 불의의 사고에서 구조돼 회복한 후에도 자연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새들이 이곳에서 보호되고 있다. 
게다가 궁대오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의 덤불 주변에서는 700여 년 전에 쌓은 잣성(담)도 만날 수 있다. 잣성을 경계로 하는 양쪽의 지형이 판이하다. 동북쪽에는 탐라목장 지대가 펼쳐지고, 서북쪽에는 오래전 농사를 지으며 거주한 것으로 여겨지는 경작지와 주거지가 펼쳐지거나 수림에 감춰져 있다. 경작지 너머로 무성한 대나무 숲이 길게 이어지고, 대나무 숲 너머로는 백약이오름 곶자왈이 펼쳐진다. 

제주에서 대나무 숲이 있다 함은 예전에 마을이 있었음을 대변한다. 제주선인들은 대나무를 이용해 구덕 등 다양한 생활도구를 만들고 편의시설도 만들었을 것이다. 그곳 어딘 가에는 곶자왈에서 구한 나무들로 숯을 굽는 숯가마 터도 있다고, 특히 곶자왈 앞에 있다 해 ‘곶앞’이라 하는 오래된 마을도 있었다고 전한다. 곶앞에는 자그마한 여러 가름(동네)들이 저마다의 이름으로 전래되고 있다. 무성한 대나무 틈 사이로 마을이 있다 해 대틈곶, 수림이 짙은 곶자왈 근처에 있다 해 황무술이(黃茂藪), 수산리 설촌이 시작됐다 전하는 동박(백)낭가름(木橋藪), 양수의 난의 진원지로 추정되는 양수 등등. 

적게는 10호에서 많게는 50호 수백 명이 곶자왈 품 안에서 대를 이어 살던 사람들은 4·3을 전후해 아랫마을로 흩어져야 했다. 그리고 여러 가름을 품었던 곶앞도 사라졌다. 지금 이곳에는  4·3으로 잃어버린 마을을 알리는 표지석은 없다. 그래서인지 곶앞 마을은 4·3 이전에 폐촌 됐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이에 대한 연구검토가 추후 이뤄질 필요가 있어 보인다. 수산리지(2021)에 따르면, 1785년 수산1리 거주자가는 368명, 수산2리는 325명으로 엇비슷하다. 1910년에는 1리가 1092명인 반면 2리는 253명에 불과하다. 2020년 현재는 1리가 979명이고, 2리는 413명이다. 

탐라순력도 교래대렵.
탐라순력도 교래대렵.

▲곶앞과 뒷곶 그리고 탐라순력도 교래대렵

제주의 곶자왈과 관련해 전래되는 특이한 지명 중에는 ‘곶앞과 뒷곶’이 있다. 수산곶자왈 앞에 위치한 마을이라 해 곶앞이라 불리듯, 교래곶자왈을 그곳 사람들은 ‘뒷곶’이라 부른다. 뒷곶은 마을 뒤에 있는 곶자왈이란 의미이다. 교래곶자왈과 관련한 뒷곶과 수산곶자왈과 관련한 곶앞이란 지명은 곶자왈 지역에서의 목축과 사냥을 통해 삶을 이어온 선인들의 역사문화의 흔적이다. 

이와 관련된 탐라순력도 교래대렵(橋來大獵)은 교래곶자왈 일대에서 행해졌던 대규모 사냥에 관한 기록화이다. 1702년 10월 11일, 교래 지경에서 진상(進上)할 대규모 사냥을 위해 동원된 사람들과 수확물이 엄청나다. 그날 사냥에 참여한 관원으로는 삼읍 수령과 감목관(監牧官)이고, 동원된 인원수로는 말을 타고 짐승을 쫓던 마군 200명, 뛰어다니며 짐승을 한곳으로 모는 보졸 400명, 포수 120명 등 720여 명이다. 사냥으로 잡은 산짐승과 날짐승은 사슴 177마리, 노루 101마리, 멧돼지 11마리, 꿩 22마리 등이다. 당시 제주의 산짐승으로는 노루·사슴·돼지·지달·오소리 등이 서식했고, 날짐승은 꿩·까마귀·솔개·참새 등은 있었으나 황새·까치 등은 없었다 한다. 

곶앞이 있던 수산곶자왈이 곧 백약이오름 곶자왈이다. 백약이오름 곶자왈 주변 탐방은 이름난 산들을 만나는 즐거움도 있다. 구좌·성산에 산재한 동거문이오름, 백약이오름, 다랑쉬오름, 용눈이오름들은 저마다의 사연과 능선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며 탐방객들을 반긴다. 
백약이오름이 위치한 표선면 성읍리 산1번지에서 성산읍 수산리까지 5.5㎞에 달하는 길이로 용암이 흐르며 만들어진 대지는, 무수한 세월이 골짜기와 오름과 산 사이를 흐르며 숲을 이루고 세월 꽃과 같은 곶자왈을 이뤘던 것이다. 

제주선인들은 곶자왈을 한자로 꽃 화(花)로 기록했다. 제주의 심장이자 허파인 곶자왈의 쓰임을 미리 내다본듯한 작명이다. 수산곶자왈을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는 대교수(大橋藪)로, 증보탐라지 등에는 목교수(木橋藪) 등으로 기록돼 있다. 제주삼현도와 탐라지도병서 등의 고서에도 수산2리를 화남촌(花南村), 흘전촌(訖前村), 화전(花前)마을 등 다양한 이름으로 기록되고 있다. 오래전 설촌 돼 여러 가름을 품으며 다양한 이름으로 전승되던 곶앞은 4·3을 전후해 사라져, 이제는 이름과 함께 곶자왈 지대 대나무 숲으로 남은 셈이다.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리에 위치한 수산한못 전경.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리에 위치한 수산한못 전경.

▲절경으로 복원된 수산한못

수산평에 위치했던 옛 탐라목장 도처를 거닐다 보면 자연스레 들리는 곳이 수산리 2835-1번지 일대에 조성된 수산한못이다. 
고문서인 탐라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 고지도인 탐라순력도와 김정호의 동여도 등에는 수산한못을 대지(大池) 또는 한지(漢池)로 표기돼 있다. 1276년 이후 설치한 탐라목장은 元史에도 등장하는 원나라가 세계의 주요 복속국가에 설치한 14개 황가목장(皇家牧場) 중 하나였다. 
탐라목장 지경에 위치한 수산한못은 몽골이 탐라를 군마 사육장으로 집중 육성할 때부터 조성돼 사용해오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며 최근까지도 수산한못은 마소에게 물을 먹이고 주민들의 식수로도 사용했던 유서 깊은 곳이다. 

수산리 마을에서는 1980년대까지 번을 정하여 우마에게 물을 먹이기도 했다 한다. 당시에는 못 동쪽에 테우리들이 사용하던 ‘물통’도 있었다. 그동안 방치됐던 이곳을 마을에서 복원해 붙인 이름이 수산한못이다. 한은 크다는 뜻이므로 수상한못은 수산평에 있는 큰 못이라는 의미이다. 
수산리는 이름에 어울리게 마을 도처에 용천수·연못·습지가 예전에는 27개나 있었다. 그동안 빗물 등에 의해 토사가 유입돼 연못으로써의 기능을 못해 방치되던 이곳을 마을에서 2011년부터 제방을 보수하고 잔디 등을 심고, 환경부 멸종위기의 야생식물인 전주물꼬리풀도 복원하여 오늘의 명소로 탈바뀜 시킨 것이다. 
수산한못 정자에 앉아 또는 못 산책길로 오가며 주변 풍경을 살피는 것은, 이곳에 깃든 오래된 역사와의 만남이고 미래를 위한 안식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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