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현서 제주목·정의현·대정현 체제로 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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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 탐라·동도·정의현 역사문화 깃든 길

1416년 제주목·정의현·대정현 체제
먼 거리로 인한 폐단에 장계 올려 
정의현 최초의 현청 있었던 수산
현재 고성리로 옛 성곽 흔적 남아
1423년 향교와 함께 성읍으로 옮겨
옛 정의현성 첫 성곽유적.
옛 정의현성 첫 성곽유적.

▲차현우 난과 왜구의 침입 그리고 제주승첩

제주사연표(2005년) 등에 의하면, 1374년 최영장군 부대가 목호의 난을 진압한 다음해인 1375년(우왕 1)에도 제주에서는 ‘차현우 난’이 일어났다. 목마관리의 공백기를 틈타 차현우 등이 말과 관련한 관사에 불을 지르고, 안무사 임완·목사 박윤청·마축사 김계생 등을 죽이고 민란을 일으켰다. 이에 성주 고신걸과 왕자 문신보는 병사를 모아 차현우 등을 물리쳤다. 

1376년과 1377년에는 왜구들이 200척이 넘는 배에 나눠 타 수천 명이 제주에 침입, 전도에 걸쳐 노략질을 했다. (일설에는 목호 가족들을 구출하려 입도했다고도 전한다.) 이에 성주 고신걸과 왕자 문신보는 전라도 수군 도만호 정용과 윤인우 등과 함께 이들을 막아냈다. 1555년 일어난 을묘왜변 제주대첩보다 177여 년 앞서 제주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친 것이다. 

특히 성주 고신걸은 적의 화살을 맞으면서도 앞장서 왜구를 격퇴했다. 이 승첩이 고려 조정에 알려져 호조판서(戶曹典書)와 여러 귀중품이 하사(下賜)됐다. 이에 고신걸은 아들 봉례(마지막 성주)와 함께 조정을 찾아가 답례하기도 했다. 제주고씨 전서공파는 이로부터 비롯됐다 한다. 
한편 8준마를 거느리던 이성계 장군은 1388년 제주마 응상백을 타고 위화도 회군을 단행한 후 1392년 조선을 개국했다. 

옛 정의현성 첫 성곽유적의 달라진 주변 모습.
옛 정의현성 첫 성곽유적의 달라진 주변 모습.

▲제주목·정의현·대정현 3읍의 탄생

제주에서는 1300년 즈음 실시된 기존의 동서도 15현 체제에서 1416년 제주목·정의현·대정현으로의 3읍 체제가 들어선다. 조선왕조실록 등에 따르면, 제주 목사(겸 안무사) 오식과 전 판관 장합 등이 조정에 제주3읍 정립을 위한 장계를 올리니, 조정이 이를 윤허(允許)했다. 

조정에 올린 장계의 주요 내용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산남에 사는 백성들은 왕래하는 게 어려울 뿐만 아니라 관리들은 군마를 고찰한다는 핑계로 폐단을 일으키고, 아무 때나 사냥하면서 약한 백성들을 괴롭히기도 했다. 하지만 거리가 멀어 목사와 판관이 그 사연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해를 거듭할수록 여러 폐단이 생겨났다. 이에 오식 목사 등이 조정에 장계를 올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본읍인 제주목에 동도의 신촌현·함덕현·김녕현과 서도의 귀일현·고내현·애월현·곽지현·귀덕현·명월현을 귀속시켰다. 
특히 산남 90여 리 땅을 동서로 나눠 동도에는 정의현을 본읍으로 삼아 토산현·호아현·홍로현 3현을, 서도에는 대정현을 본읍으로 삼아 예래현과 차귀현 2현을 소속시켜, 목에는 목사를, 현에는 현감을 뒀다. 

탐라순력도 수산성조(首山城操). 1702년(숙종 28) 11월2일 정의현 수산진성에서의 성정군 군사훈련을 점검하는 그림.
탐라순력도 수산성조(首山城操). 1702년(숙종 28) 11월2일 정의현 수산진성에서의 성정군 군사훈련을 점검하는 그림.

▲정의현의 첫 현청 도읍지 고성리

1416년 제주·정의·대정 삼읍 체제로 출발할 당시에는 정의현 현청을 수산(현재의 고성리) 지경에 뒀다. 이후 정의현의 첫 도읍지로 최초의 현성이 있었던 수산리 지경은 옛 성이 있었던 마을이라 해 고성(古城)이라 불리게 됐다. 

지금의 고성리에 구축했던 정의현청 성곽은 1910년 일제의 ‘읍성철폐령’에 의해 성산포의 터진목 등 바다를 메우는 데 사용됐다. 정의현 첫 현성의 성문이 있었던 곳은 지금 마을길로 바뀌었다. 옛 성곽의 흔적으로는 고성리 서쪽 속칭 도깨비동산에 폭 2m, 높이 2m, 길이 150m 정도가 남아 있다. 

탐라순력도 수산성조(首山城操)에는 이곳을 구수산 고성(舊首山 古城)이라 표시하고 있으며, 또한 지금의 고성리 일대가 잘 그려져 있다.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해 제주에 온 군위오씨 입도조인 오석현 전 나주영장의 묘가 있는 수산봉은 수산리가 아닌 고성리에 속한다. 

이에서 보듯 고성리는 오래전 수산리 지경이었다. 처음 우도 가까이에 있었던 정의현에는 강풍이 자주 몰아쳐 곡식이 잘 익지 않고, 왜적이 자주 침범했다 한다. 조선왕조실록(탐라록)과 탐라지 등에 따르면, 1417년 정의현감 이이는 한라산 남쪽에 연달아 있는 정의현 4현을 살피고 난 후, 백성들이 왕래하는데 거리가 너무 멀어 정의현의 중앙인 서촌·진사·토산 중 적당한 곳에다 읍성을 설치하는 게 좋겠다는 장계를 올렸다. 

1420년에도 제주경차관 박호문이 정의현성 안에는 샘물이 없어 가물 때는 15리 밖에서 물을 길어오니 현청을 토산 또는 진사리로 옮길 것을 건의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1422년(세종 4) 12월 목사(도안무사 겸임) 정간에게 명하여 정의현성을 진사리로 옮기도록 하니, 이듬해인 1423년 판관 최치렴 감독 하에 3읍 백성을 동원해 돌로 축성케 했다. 당시 성의 주위는 2981척이고, 높이는 13척이었다. 정의향교 역시 1420년 지금의 성산읍 고성리에서 생도 50명으로 문을 열었다가 현청이 1423년 성읍으로 옮기면서 향교도 옮겨갔다. 

탐라순력도 정의강사(旌義講射). 1702년(숙종 28) 11월4일 동짓날에 정의현에 머물면서 시행한 강사(講射), 즉 강(講)받기 시험과 활쏘기 시험 장면.
탐라순력도 정의강사(旌義講射). 1702년(숙종 28) 11월4일 동짓날에 정의현에 머물면서 시행한 강사(講射), 즉 강(講)받기 시험과 활쏘기 시험 장면.

▲배추의 기(裵樞之記)에 실린 정의현 이설과 축성 과정
‘배추의 기’를 쓴 이(裵樞)는 목사를 수행하던 관리의 이름이다. 1423년 제주판관 최치렴의 감독 하에 정의현을 축성하게 한 목사는 정간이다. 정간 목사는 정의현성의 성읍으로의 이설과정을 현청 낙성식에 목사를 수행한 배추에게 쓰도록 명하였다. 이에 배추가 남긴 기록이 ‘배추의 기’이다. 배추의 글 중 정의현성 이설 및 축성과 관련한 주요 내용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한라산는 섬 가운데 웅거하고 제주는 산의 북쪽에 있다. 산의 동서가 모두 제주에서 90리 거리이며 산의 남쪽 또한 멀다. 백성들이 왕래하는 데 이틀이 소요되고 관청에서 공문을 보내면 며칠 뒤에야 도착한다. 이런 까닭에 목사 오식이 제주를 안무할 적에 제반 사항을 갖추어 조정에 보고하여 (제주를 1416년) 셋으로 나누었다. 
서쪽에는 대정현을 동쪽에는 정의현을 두었는데, 정의는 가장 동쪽에 위치하여 산남까지의 거리가 적어도 80-90리는 되었다. 이에 도안무사(겸 목사) 정간이 순시하여 진사리에 이르러 말하기를 ‘여기에 현을 세우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정간 목사가 이를 백성들에게 물으니 모두 기뻐하여 따랐다. 이에 임금께 알린 후 세 고을 백성을 사역시키고 판관 최치렴에게 감독하게 하였다. 최치렴 공은 성곽의 두께, 높이, 노동력, 공기(工期) 등을 헤아리고 계산하여 명령을 부지런히 이행하였다. 궁가(弓家:성가퀴)를 높이고 세 문을 세우니, 성터는 2520자이고, 높이는 13자이다. 계묘(1423년) 정월 초 9일에 시작하여 13일에 끝나니, 이룬 결과가 심히 신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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