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의 역사적 정명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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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흥식, 수필가

일제강점에서 벗어난 해방은 우리에게 민주적인 통일국가 수립이라는 민족적 과제를 안겨주었다. 제주도민들이 제주4·3사건을 거치면서 얼마나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고 핍박을 받았는지는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도 못할 것이다. 군사 정권과 보수 단체들은 4·3을 반란 또는 공산폭동으로 규정한 반면 학계와 시민 단체에서는 민중항쟁으로 정의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태평양 전쟁이 끝나자 제주에 주둔했던 7만여 명의 일본군이 자국으로 철수했다. 1947년 3·1절 행사 시 일어난 경찰의 무차별 발포사건 이후 지속적인 미군의 탄압이 4·3의 주된 원인이 됐다. 3·1사건 후 서북청년단원들이 빨갱이를 사냥한다는 명목으로 테러를 일삼아 민심을 자극했다. 결국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께 한라산 기슭에는 봉화가 타오르면서 남로당 제주도위원회가 주도한 무장봉기가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사건 발생 수십 년이 지나도록 진상규명이 미흡해 진실과 정의가 은폐돼 왔다.

2000년 1년 12일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고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가 출범했다. 이후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가 실시됐으며 2003년 진상조사 결과를 담은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확정 발간됐다. 그 후에 노무현 대통령은 과거 국가 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제주도민에게 사과와 위로를 드린다며 공식 사과를 했다.

제주4·3은 2021년 보상법개정 등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순리적인 해결 절차를 밟아왔다. 당연히 국민적 공감대를 얻는 명칭의 정립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본다. 4·3 정명이 어려운 이유는 국가주의 입장과 시민사회의 입장이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주도민 공동체와 국민적 합의 과정을 거처 역사적 사건의 정명이 이뤄지고 교과서에도 수록돼야 한다고 본다.

이 사건은 1948년 당시 제주도민 공동체가 봤을 때 서북청년단원과 경찰 등 외부 세력의 탄압에 대한 저항으로 볼 수 있다. 한편 남로당과 무장대가 봤을 때 단독정부 수립반대 통일운동으로 볼 수 있다. 1947년 3·1절 사건으로 도민 6명과 1948년 3월 경찰의 고문으로 청년 2명이 죽었다. 1948년 4월 3일의 무장대의 습격으로 12명의 인명이 죽는 사태가 발생했다.

결국 이 사건은 공권력의 무리한 초토화 작전으로 주민들이 집단적으로 희생됐다고 볼 수 있다. 앞으로 4·3의 정명을 위한 민간 학계의 연구 성과가 축적돼 역사적 명칭이 정해지기를 기대한다. 어떻든 일촉즉발의 전쟁의 위기를 안고 살아가는 한반도의 현실, 민족사의 비극을 넘어서기 위해서 제주4·3을 정명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오늘날까지도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주변 강대국에 휘둘리는 상황이 한국의 현대사회이다.

그런데 제주도에서 전개된 4·3의 진실추구 운동 과정에서 보이는 공동체 화합과 평화통일 지향의 메시지는 충분히 세계적이고 보편적 가치를 담고 있다고 본다. 이제 제주의 4·3에도 희망의 새싹이 움트기를 간절히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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