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산에서 다시 수산으로…왜구 방어 천연의 요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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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 탐라·동도·정의현 역사문화 깃든 길
조선시대 초 9진 중 처음 축조
주 거점지 성산진성으로 이동해
1597년 일시적으로 폐성되기도
일제강점기 거치며 일부 철폐
탐라순력도 수산성조.
탐라순력도 수산성조.

▲제주9진 중 앞서 쌓은 수산진성

제주에는 외적을 방어하는 관방(關防)시설로 3읍성·9진성(25봉수·38연대)이 있었다. 읍성이 군사기능과 행정기능을 겸한 반면, 진성은 방어기능을 수행하는 군 주둔지였다. 조선조정은 우도 부근에 출몰하는 왜구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1439년(세종 21) 한승순을 목사겸 안무사로 임명해 9진 중 최초로 수산진성을 축성토록 했다. 같은 해에 차귀도 앞에 차귀진성과 새섬 앞에 서귀진성도 쌓았다.

1510년 명월·별방·애월 방호소에 진성이 축성되고, 이후 조천포·모슬포·화북포에도 진성이 구축됐으나 1910년 ‘일제의 읍성철폐령’으로 성문이 먼저 사라지고 1920년대부터 대부분의 진성이 읍성과 함께 항구를 구축한다는 구실 등으로 바다에 매립되기도 했다. 탐라순력도(1702) 수산성조(首山城操)에는 정의현 소속의 수산진성과 옛 정의현청이 있었던 구수산고성(舊首山古城)의 위치가 상세히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성산도(島) 터진목 등을 매립하면서 바닷가 인근에 있던 구수산고성 성담들이 주로 사용되고, 수산진성 역시 성문·여장·성가퀴 등이 철폐됐다. 다행히 상대적으로 먼 곳에 위치한 수산진성 성곽은 덜 철폐돼 성곽유적이 9진성 중 가장 양호한 편이다.

2005년 도지정문화재 기념물로 지정된 수산진성은 축조방식과 평면형태 등이 읍성과 유사할 뿐만 아니라 바닷가에 위치한 다른 진성에 비해 내륙으로 꽤 치우쳐 있어, 군사기능 이외에 읍성 역할도 겸해 구축된 것으로 보인다. 성 둘레가 550여 미터에 달하는 수산진성은 규모로는 명월·별방·차귀 진성에 이어 네 번째 크기이다. 성안 시설로는 성문·우물·객사·익랑·군기고 등이 있었고, 연계된 관방시설로는 수산봉수·독자봉수·성산봉수·협자연대 등과 동남쪽 해변의 환해장성 등이 있었다.

1597년 이경록 목사가 일출봉 바닷가 인근에 축조한 성산성이 왜구침입에 대비한 거점지로 활용되면서 수산진성은 일시 폐성되기도 했었다.

수산진성 성곽유적.
수산진성 성곽유적.

▲성산진성 거쳐 도로 수산진성으로

1592년 부임한 이경록 목사는 1597년 제주의 주 방어진으로 삼을 진성을 성산에 축성하면서 제주읍성의 병력을 성산으로 옮겼다. 성산을 천연의 요새로 여긴 이경록 목사는 삼읍의 군병기와 창고를 모두 이곳에 옮기는 한편, 수산방호소도 이곳에 이전해 왜구침입을 방어하려 하였다. 여러 전시 상황을 맞아 주 방어진 옮김이 불합리하다고 판단한 이경록 목사는 1598년 주성을 다시 제주읍성으로 옮겼으며, 일부 병력만을 성산에 남겼다.

임진왜란 중 부친상을 당하고도 유임돼 성산외성 구축에 전념하던 이경록 목사는 성산성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1599년 이곳에서 병사했다. 수산진성을 성산으로 옮긴 것을 두고 1601년 안무어사로 입도한 김상헌은 ‘성산진성을 중심으로 왜적을 방어한다는 것은 적에게 스스로 포로가 되는 최악의 계략’이라고 주청했다. 이에 따라 이경록 목사 후임으로 온 성윤문 목사는 성산에 남아있던 병력을 수산으로 옮겨 진성을 정비하였다.

다음에 소개될 ‘길운절·소덕유 역모 사건’이 1601년 제주에서 일어나고, 이에 위무 차 제주에 왔던 김상헌(제주오현)의 주청에 따라 성산성에서 다시 수산진성으로 왜적 방어기능을 환원시켰던 것이다. 현재 성산성의 흔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은 반면 수산진성의 유허는 수산초등학교 울타리에 상당량 남아있으며, 서문이 있던 곳에는 해자가 시설되었던 흔적도 남아있다. 수산진의 장두로 1705년 만호를 두었다가 1718년 조방장으로 환원되었다.

이원진의 탐라지(1653)에는 ‘돌로 쌓은 수산성은 주위가 1164자, 높이가 16자이고, 좌우에 문이 하나씩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해방 전에 민가가 몇 있던 수산진성 터에서 해방 후인 1946년 지금의 수산초등학교가 개교했다.

 

민심 흉흉한 틈타 반역 도모…주모자 참형으로 다스려

 

▲길운절·소덕유 역모 사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정씨가 왕이 된다는 정감록이 퍼지고, 이후 여러 차례 역모 사건이 발생하였다. 특히 1589년(선조 22) 일어난 정여립의 역모 사건은 정치권력의 지형을 바꿀 만큼 큰 영향을 끼쳤다.

1601년 제주에서 일어난 역모 사건도 그러한 영향 중 하나였다. 정여립 첩의 친척으로 육지에서 일어난 역모 사건에도 가담했던 소덕유는 비밀이 샐 염려가 적은 제주에서 역모를 꿈꿨는데, 이렇게 해서 제주에서 일어난 사건이 이른바 소덕유·길운절 역모 사건이다.

정여립의 모사(謀士)인 길운절은 앞서 제주에 온 소덕유와 제주에서 1601년 만나, 토호세력 등을 회유해 제주에서의 모반을 준비하고 있었다. 토호 문충기는 납마첨지(納馬僉知)로 제주에서는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양대 전쟁으로 조정의 행정력이 제주에 덜 미치는 시대 상황에 더해, 특히 도민들을 학대하는 성윤문 목사가 민심을 잃고 있는 상황이 역모 사건에 가담할 자를 끌어드리기에 좋은 환경이었던 셈이다.

한겨울에 성윤문 목사는 성을 쌓도록 강제해 도민들의 원성이 매우 높았고, 진상과 부역 등으로 중앙정부에 대한 불만이 높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모 가담자들은 목사와 경래관을 죽이고 무기와 전마를 징발해 바다 건너 한양을 점거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고. 그러는 도중 음모를 엿들은 구생이란 기생이 길운절을 추궁하며 고발하겠다고 하자, 길운절은 성윤문 목사에게 거사 2일 전 변란계획을 몰래 알렸던 것이다.

이에 제주목과 조정에서는 주모자 18명을 체포, 한양으로 압송해 소덕유·문충기·홍경원·김정걸·혜수·김대정·이지·김종·강유정 최구익 등을 능지처참으로 다스렸다.

또한 제주 유림 30여 명이 심문을 받고 길운절도 처형되니 제주의 민심은 흉흉해졌다. 이에 조정에서는 1601년 안무어사 겸 안핵사로 청음 김상헌을 제주에 보내어 진상을 조사하게 하고, 동요하는 도민들을 위무하기 위해 제주에서 과장(科場)을 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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