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숭아꽃 물들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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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미숙, 재릉초등학교 교장·수필가

해마다 이때 즘이면 설레는 이벤트가 있다. 그것은 바로 봉숭아꽃 물들이기다. 각박한 세상에 봉숭아 꽃물이 추억을 실어다 주는데, 어느새 삶은 강물같이 흘러 멀리도 와 버렸다.

봉숭아는 왠지 화단에는 어울리지 않은 꽃이다. 울 밑에선 봉선화라 했던가. 그저 마당 한 편에서 피면 피는 대로 지면 지는 대로 그대로 보는 게 좋다. 그래서 울타리 없는 이웃 같고, 오랜 친구처럼 정겹다. 외모도 그리 말끔하지는 않다. 길가의 먼지가 부옇게 내려앉은 초록 잎새에 손 닿기만 하면 톡 하고 떨어지고야 마는 꽃잎들. 흠 많고 연약한 봉숭아라 더 친근하다.

붉은색 분홍색 봉숭아꽃이 만발한 초여름 어느 날, 봉숭아 꽃물들일 생각에 저녁밥도 대충, 큰언니 따라 다들 마루에 모여 앉았다. 한낮에 미리 따놓아 소들 해진 꽃과 이파리들은 조그만 사기 절구에 빻으면 금세 핏빛보다 진한 액체를 뿜어냈다. 미리 재단해 놓은 비닐을 송송 감아 손톱 위에 얹힌 것을 둥글게 감싸고 하얀 무명실로 칭칭 묶는다. 그렇게 열 번을 반복하여 열 손가락 모두 봉숭아를 품었다. 이제 남은 것은 기다림뿐이다.

예뻐질 손가락을 상상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잠을 청한다. 더 고운 색을 내려고 신발장에 꼬깃꼬깃 넣어둔 검정 비닐 속의 하얀 백반 알갱이를 넣은 것도 모자라 감아놓은 비닐이 빠진다고 실로 꽁꽁 감은 탓에 손가락이 아프고 욱신거렸다. 아니 손가락 마디가 아리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몇 번씩 잠에서 깨곤 했다. 오늘 밤만 참으면 될 일이다. 초저녁의 초롱한 별빛도 스러지고 한밤중 달님도 질 터인데, 두어 시간만 자고 나면 손톱 끝에 봉숭아는 남아있겠지.

드디어 설레는 아침 긴장된 순간, 얼음공주로 잠을 잤지만 한 개는 이불 밑에 한 개는 배게 밑에 벗겨져 숨어 있다. 여덟 개는 선홍빛으로 두 개는 연한 주황빛이다. 뜨거웠던 여름을 추억하듯 내 손가락은 열정적인 다홍빛으로 존재감을 자랑했다.

첫눈이 올 때까지 손톱에 남아있으면 첫사랑이 이뤄진다는 말에 봉숭아꽃 물들이기는 왠지 모를 아련한 슬픔이고 그리움이 되었다. 꽉 찼던 선홍빛은 헤어짐에 서서히 초승달로 떠오르고 발육이 더딘 새끼손톱만이 오매불망 첫눈을 기다렸다.

구름 속 달님이 얼굴을 내민다. 무명실 칭칭 묶어 주던 곱디고운 언니는 어딜 가고 세월의 검버섯만 앉아있다. 봉숭아꽃 얹혔던 조그마한 내 손도 거칠고 주름진 손으로 변했다. 저녁놀 붉은빛이 손톱에 피어날 때마다 밝아오는 아침을 성스러이 맞이했던 시절에 눈물이 난다.

봉숭아 꽃잎을 으깰 때마다 그 진한 즙을 보면 봉숭아 눈물 같다고 생각했다. 아직 다 하지 못한 것이 많아서 꽃보다 더 진한 피를 토해내는 것일까. 펑펑 울고 나면 나아질까.

죽어서 꽃이 된다면 봉숭아꽃이고 싶다. 꽃으로서 사명을 다하는 날, 누군가의 손톱 끝 마디마디 봉숭아꽃 붉게 물든 선홍빛 그리움이 되고 싶다. 그래, 첫눈 올 때까지 남아있게 해줄게. 달빛 구름 사이로 그리운 얼굴이 살며시 드리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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