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영원한 미스 고
나는 영원한 미스 고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고진숙 / 수필가

미스 고가 보고 싶다는 서점 아줌마의 문자를 받았다. 반가운 마음에 연락을 드렸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예전 그대로였다.

아줌마와 처음 만난 건 1985년 내가 이십 대 후반이었을 때다. 그때 나는 제주도에서 올라와 처음 자취를 시작했다. 서울 충정로 근처 ‘디귿’자 형型의 한옥이었다. 아줌마의 집은 넓은 마루에 피아노까지 있어서 집주인인 줄 알았다. 친해지고 보니 나와 똑같은 세입자였다.

아줌마는 서점을 운영했다. 초등생인 큰딸과 막내아들을 학교에 보낸 후 온종일 서점에서 지냈다. 서점 문 닫는 시간이 밤 열 시라 아이들끼리 지내는 것이 걱정이었다. 그런 날은 내가 서툰 솜씨로 아이들이 좋아하는 카레밥이나 떡볶이를 만들어 주었다. 숙제도 봐주고 재미있는 놀이도 했다. 아이들은 나를 “미스 고 언니”, “미스 고 누나”라고 불렀다. 막내아들은 초롱초롱한 눈을 반짝이며 “미스 고 누나는 미스코리아보다 더 예뻐!”라고 말해주곤 했다.

캄캄한 밤에 어린 두 남매만 있었더라면 무서웠을 시간. 그 시간을 함께해 준 ‘미스 고’가 엄마의 손길만큼은 못해도 위로가 되었던 모양이다. 아줌마는 나를 한 식구처럼 대해주었다. 맛있는 음식이 있을 때는 늘 밥상에 불러주었다. 나는 일 없이 백수로 지내던 터라 틈만 나면 서점으로 갔다. 취직한 후에도 쉬는 날이면 서점에 가서 새로 나온 잡지와 책을 읽었다. 가진 것은 없지만 책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배가 부른 듯했다.

아줌마는 마치 내 외로운 영혼을 채워주려는 의무를 띤 사람 같았다. 어느 날은 “미스 고가 교회를 다니면 내 마음이 기쁘겠어.”라고 말하면서 성경책을 건네주었다. 혼자 버티고 있는 내게 뭔가 해 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그 후 아줌마를 따라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새벽 기도와 주일 예배에 동행했다. 그렇게 열심히 다니던 교회는 아줌마와 헤어지면서 멀어졌지만, 그때의 믿음이 살면서 나를 돌아보게 했다.

속 깊은 아줌마도 가끔 외롭게 보일 때가 있었다. 누구에게도 말 못 할 사연을 내게 말하곤 했다. 착하게만 보이던 아저씨는 자주 사고를 쳤다. 서점에서 발행했던 만기 회수된 가계수표를 사용했고, 도박벽도 불쑥불쑥 나타났다. 어떤 날은 월급봉투를 술집에 몽땅 털리기도 했다. 아줌마의 마음은 푹푹 썩어 들어갔다.

한옥이 헐리면서 아줌마는 빌라를 마련해 나갔고, 나는 외삼촌이 사는 동네로 이사했다. 서울 생활에 익숙해지자 출판사에 취직했다. 마케팅 일을 하면서 출판에 관한 공부도 시작했다. 아줌마와 나는 바쁘게 지냈지만 짬짬이 만났다. 그럴 때마다 미스 고가 잘 사는 모습이 보기 좋다며 흐뭇해했다. 어느 날 갑자기 아줌마는 일하다 쓰러져 수술까지 받고 위험한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이제는 아이들 모두 결혼시켰고, 아저씨와 노후를 함께 보내고 있다.

아줌마는 내게 울타리 같은 존재였다. 살면서 네 잎 클로버처럼 찾아온 첫 번째 행운이었다. 어쩌면 나보다 아줌마가 덜 힘들지도 모를 시간이었는데, 사회 초년생이었던 나를 가족처럼 다독여 주었다. 캄캄한 저녁, 아이들과 함께했던 그 시간이 내게는 큰 위안이 되었다. 고향을 떠나 흔들림 없이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것도 아줌마 덕분이 아닐까. 신산했던 그 시절을 봄날 같은 날로 기억나게 해 주었던 분.

깊어 가는 여름, 아줌마와 좋아하는 열무국수라도 먹으러 가야겠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