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식물 연구 업적…벚나무 원종 발견하기도
제주 식물 연구 업적…벚나무 원종 발견하기도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245) 신부 타케
타케, 프랑스 신부·1902년 입도·감귤나무 심기도
탁명숙, 3·1만세 운동 등 항일 활동·제주보육원장
편거영, 제주에 영상문화 활성화·무궁화 보급 기여
하윤규, 한림 수원 태생·독립군자금 모금 등 활동
국립수목원이 2018년 유전체 비교 검사 샘플로 사용한 제주시 봉개동 한라산 자생지의 왕벚나무. 1964년 천연기념물 제159호로 지정됐다. 제주산 왕벚나무는 프랑스인 천주교 신부로 제주에 부임한 타케가 1908년 한라산 관음사에서 자생하는 왕벚나무를 발견, 유럽 학계에 보고하면서 처음으로 알려졌다.
국립수목원이 2018년 유전체 비교 검사 샘플로 사용한 제주시 봉개동 한라산 자생지의 왕벚나무. 1964년 천연기념물 제159호로 지정됐다. 제주산 왕벚나무는 프랑스인 천주교 신부로 제주에 부임한 타케가 1908년 한라산 관음사에서 자생하는 왕벚나무를 발견, 유럽 학계에 보고하면서 처음으로 알려졌다.

▲타케:1873~1952, ‘타케’ Taquet, Emile Joseph는 신부. 프랑스의 식물학자. 제주도의 식물 연구가. 파리 외방전교회 회원, 한국명은 엄택기(嚴宅基).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의 회원으로 1889년 1월 한국에 처음 입국. 1902년 4월 20일 뭇새신부의 후임으로 한논 본당을 담당했다.

신축년교란(辛丑年敎難) 직후인 1902년 4월 23일 대한제국으로부터 여권을 받아 경상도와 전라도를 거쳐 동년 5월 31일 제주성내로 들어왔다.

후에 홍로(烘爐) 성당에서 시무(視務)하면서 제주의 식물 연구와 벚나무의 원종을 발견하고 또 귤나무를 심어 소득 생산에도 관심을 보였다. 1908년 4월 14일 해발 600m 지점인 관음사(觀音寺)부근에서 벚나무에서 꽃 핀 일지(一枝)를 채취하고 자기의 채집번호 제4638호를 붙여서 유럽으로 보냈다.

베를린대학 교수로 장미과 식물의 대가인 케네 교수가 이것은 일본 에도(江戶)에 있는 요시노사쿠라(吉野櫻)의 한 품종이라고 인정했다.

엄신부는 20년 간 제주에 체류하면서 선교 사업의 여가에 꾸준히 제주도 식물 연구에 몰두, 특히 그는 일본 식물학자 나카이(中井猛之進)와 함께 제주도 식물 조사에 큰 업적을 남겼다. 타케는 포리(Faurie:方소동) 신부와 함께 식물 채집에 열중했다.

포리 신부는 파리 외방전교회 회원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식물학자이다. 식물 연구를 위해 우리나라를 몇 차례 왕래한 바 있다. 타케와 포리는 1904년부터 홍로에 살면서 전도하는 여가에 식물 채집을 하고 표본을 구라파에 보냈다.

한편 1939년 일본의 유명한 식물학자 오수미(小泉源一)도 벚꽃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품종인 요시노사쿠라(吉野櫻)의 원산지가 제주도임을 인정, 제주도의 벚나무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국화로 지정된 것이다.

이러한 연구의 원초는 바로 타케 신부에 의해 밝혀진 것이며 현재 도내 명소의 벚꽃은 일본에서 역수입해 심은 것이다. 지금도 서귀포시 호근리 북쪽 600m 이상 고지를 보면 자생한 벚나무 고목에 이 벚꽃이 만발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탁명숙卓明淑(여):1893(고종30)~1972, 기미년 3·1 만세운동 당시의 항일 활동. 사회사업가. 제주보육원장. 간호사. 일명 탁마리아(卓瑪利亞).

함경남도 함흥군 서호(西湖)면 서도(西嶋)리에서 탁윤철의 장녀로 태어났다. 일본 학창시절에 제주도 토백이 와세다(早稻田)대학 정치과 학생 현(玄)이라는 성산포 분을 알게 돼 결혼하게 되고, 이로써 평생 제주와의 인연을 이어나갔다.

이에 앞서 기미년 만세(萬歲) 때 일선에 나서서 만세를 높이 불렀다. 이로써 1919년 8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앞서 ‘세브란스간호양성소’ 4년을 25세에 졸업, 중국 소주(蘇州)라는 곳으로 네 처녀가 건너가 소주사범학교에서 공부했다. 여름방학에는 상해에 가서 세 친구와 같이 독립운동의 영웅들의 하교(下敎)를 받기도 했다.

♣거국적인 만세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 운동은 25세의 탁명숙을 가만있게 하지 않았다. 3월 1일 당일 남대문의 시위운동에 참여, 특히 여성들을 지휘하는 데 앞장섰다. 이어 3월 5일 밤에는 각 전문학교 및 중등학교의 학생 대표들 63명과 함께 어울려 시위 대책을 숙의하던 중 일제에 발각돼 지휘부의 동지들과 함께 체포됐다. 이때에 여학생 최정숙(崔貞淑)을 알게 된다.

한편, 이 해 9월 강우규(姜宇奎) 의사가 사이토(齋藤實) 총독을 암살하려다 실패, 마침 보석 중이던 탁명숙은 강 의사(姜義士)를 숨기려고 9월 13일 서울 누하동 136번지의 임재화(林在和)에게 소개해 숙박하도록 도와준 일로 다시 체포됐다.

감옥에서 풀려나 함흥으로 돌아와 사립 초등학교를 설립, 3년 운영하고 남편 현이길(玄二吉)은 김녕중학교 교장으로 재임하고 탁명숙은 제주보육원 원장으로서 한국보육원장 황온순(黃溫順)과 함께 쌍벽을 이뤘던 사회사업가였다.

▲편거영片巨影:1930(일제강점기)~2015, 본명 편광우, 충남 당진 출신.

20대 후반 육군 준위로 전역한 후 영화(映畵)계에 발을 들였다. 월간 영화잡지 ‘씨네마 펜’의 편집장 등을 지낸 후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해 ‘돌아오지 않는 해병(海兵)’등을 집필했다.

이어 고인(故人)은 영화감독으로 변신해 30여 편 작품을 연출했는데 특히 ‘팔도사나이’를 통해 한국 액션 멜로를 개척하며 6편까지 시리즈로 제작했다.

고인은 25년 전 제주에 정착한 후 2003년부터 2011년까지 제주영상위원회 이사로 활동했고 제주영화인협회 회장 등을 맡아 제주영상(濟州映像)문화 활성화에 기여했다.

또 부인 강일선과 함께 ‘무궁화-사랑회’를 조직해 회장으로 활동하며 도내 곳곳에서 무궁화 식재(植栽) 운동을 펼쳤고 애국정신을 고취하도록 하는 강의에도 열정을 쏟았다.

▲하윤규河崙圭:1910(일제강점기)~1946(분단시대), 독립군자금 모금운동에 따른 항일 활동. 자는 경찬(京燦), 호는 덕겸(德謙), 가명 최대원(崔大元), 김대원(金大元), 하상겸(河祥謙), 본관은 진주, 한림읍 수원(물-캐)의 둘째로 태어났다.

1929년 3월 보성전문학교 상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뒤 조선총독부의 임시 직원이 돼 1930년 5월부터 근무했다.

하윤규는 본 시 신민지 통치기구의 공무원이란 데 구역질이 나서 8개월 만에 그만뒀다. 더구나 총독부 국세조사과의 임시 고원(雇員)으로 우리 민족의 고혈(膏血)을 빼앗는 점에 분노를 느꼈다.

그는 중국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모금해 몰래 보내기로 마음을 굳혔다. 1932년 5월 중순경부터 7월 15일까지 김대원, 혹은 최대원이란 가명을 사용하며 “나는 이번에 조선 독립운동 군자금 모금을 위해 해외에서 잠입한 바, 일본의 지금 정치는 한일합방(韓日合邦) 정신에 위배되므로 조선에서 일본 정권을 탈환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