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때 적군 방어에 헌신…7년간 섬 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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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탐라·동도·정의현 역사문화 깃든 길
목사 이경록, 숨질 때까지 방어시설 정비·군사 양성 힘 쏟아
청음 김상헌, 안무어사로 입도해 제주 체험 ‘남사록’에 기록
이경록은 1592년 제주목사로 임명된 후 제주성 위에 제승정을 짓는 등 방어시설을 정비하고 목성인 명월진성을 개축하는 등 제주의 방어시설을 돌보는 데 헌신했다. 사진은 제주목사가 업무를 보던 제주목 관아 전경. 제주일보 자료사진
이경록은 1592년 제주목사로 임명된 후 제주성 위에 제승정을 짓는 등 방어시설을 정비하고 목성인 명월진성을 개축하는 등 제주의 방어시설을 돌보는 데 헌신했다. 사진은 제주목사가 업무를 보던 제주목 관아 전경. <제주일보 자료사진>

음침한 구름과 시든 풀로 덮인 황량한 성은(寒雲衰艸掩荒城)/ 원나라 오랑캐가 말을 기르던 곳이라네(云是胡元放馬垌)/ 옛날 목호들이 여기저기 발호하였을 때(舊致牧胡多跋扈)/ 도통사가 멀리서 여러 번 군대를 일으켰네(屢權都統遠興兵)/ 가을날의 반딧불은 김통정의 놀란 핏빛 같고(通政驚血秋螢碧)/ 파란 도깨비불은 초고(목호의 거두)의 요사한 넋이라네(肖古妖魂鬼火靑)/ 나라 안과 밖이 임금님 교화를 입은 지금(聖化只今覃內外)/ 바다 나라 백성들은 밭을 가고 샘을 파네(海邦耕鑿遺氓矣)

▲무너진 수산진성(시제: 水山廢城)

위의 시는 어사로 제주에 온 김상헌이 수산진성을 돌아보고 읊은 시이다. 학창시절 암송했던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는 김상헌이 중국으로 끌려가면서 읊었다는 시이다.

화친보다 척화와 관련된 내용이 주를 이루는 그의 시는 임금에 대한 연모의 정으로 끝을 맺고 있다. 김상헌이 입도 당시의 제주목사는 백성들을 학대한 것으로 알려진 성윤문이다. 성윤문은 조천진성의 쌍벽(雙碧)루 라는 정자(누각)를 임금 향한 연모의 정이 깃든 연북(戀北)루로 개명한 이다.

임금을 향한 연모지정을 노래하는 김상헌과 성윤문. 하지만 김상헌은 척화로 병자호란을 초래해 인조를 청태종에게 무릎 꿇게 해 결국 군신관계를 맺게 한 선봉장이 됐고, 성윤문은 제주 백성들을 혹사한 목사로 기록되고 있다.

▲제주5현 청음 김상헌

김상헌은 그의 나이 30세인 1601년(선조 34) 제주에서 있었던 ‘소덕유·길운절 역모사건’을 조사하고 민심을 안무(按撫)하기 위해 안무어사로 제주에 왔다. 그리고 제주에서 체험한 것을 남사록(南槎錄)이라는 일기체 문집에 남겼다. 한라산에 올라 산신제를 지낸 것 등을 담은 남사록은 1601년 8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 6개월 동안의 제주체험을 기록한 고서이다.

남사록 원본은 서울대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보존 중이다. 김상헌과 상반돼 회자되는 이경록 제주목사는 임진왜란 당시 방어업무에 많은 공적을 남긴 인물이다. 특히 우도에 숨어 있는 왜구와 대접전을 벌이려 수산방호소를 성산으로 옮겨 외성을 축조하다 그곳에서 병사했다.

그 후 입도한 김상헌이 성산성을 돌아보고는 ‘외적에게 포위될 위험이 있어 계략치고는 졸작이다.’라고 혹평했다. 김상헌의 혹평으로 제주에서 가장 오래 재직한 목사 이경록은 평가절하된 측면도 있어 보인다.

이경록에 대한 김상헌의 혹평에 대해 생각해본다. 서울대규장각 책임연구원인 이숙인은 ‘명가의 탄생, 빛과 그림자’에서 조선시대의 가문은 혈연을 기반으로 한 일종의 이익집단이라고 혹평한다. 가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갖은 노력과 수단이 동원되기도 했다.

제주5현 중 한 분이자 척화파의 거두로 알려진 김상헌의 가문은 어떤가. 김상헌의 친형인 김상용은 병자호란 당시 우의정을 지낸 인물이다. 청나라 침공 시 김상용이 남한산성의 화약고를 잘못 터뜨려 발생한 사고사는, 동생 김상헌과 친족·측근들에 의해 의로운 자결을 한 충절지사로 바뀌었다.

이에서 보듯 이숙인은 국가적 명예를 훔쳐 가문의 번영을 도모한 가문으로 김상헌의 가문인 장동김씨를 꼽는다. 이번에는 이경록 목사의 목민관을 엿보고자 한다.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초등학교 운동장을 둘러싸고 있는 수산진성 성담.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초등학교 운동장을 둘러싸고 있는 수산진성 성담.

▲7년 재임한 최장수 목사 이경록

제주는 조선시대 때 총 286명의 목사가 부임했다. 100번째 목사로 부임한 이경록은 이순신 장군과 비슷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이순신이 성웅으로 회자되고 있는 반면 이경록은 역사의 뒤안길에 묻힌 이름이다.

서른 살 넘은 나이인 1576년(선조 9년) 이순신과 함께 무과에 급제한 이경록은 여진족과 맞선 국경지대에 위치한 고을의 수령으로, 이순신은 그 일대의 방비를 맡은 무장으로 근무했다. 당시 함경도 방위의 총책임자인 종2품 병마절도사 이일은, 여러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이순신·이경록의 병력지원 요청을 무시했다. 이 일로 희생자가 대거 발생하자, 이 일은 이순신과 이경록의 잘못인 양 이들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겼다.

결국 선조는 이순신과 이경록에게 백의종군을 명했다. 이순신은 임진왜란에 앞서 이경록과 함께 첫 백의종군을 겪은 것이다. 그 후 선조는 1591년 이경록을 나주목사, 이순신을 전라 좌수사에 임명했다. 전라도 좌수영을 총지휘하는 좌수사는 정3품 당상관이다. 이어 선조는 이경록을 1592년 제주목사로 임명했다. 임진왜란으로 의병들이 봉기해 왜적과 전투를 벌이고 있는 긴장된 순간에 선조가 이경록을 군사요충지인 제주목사로 임명한 것이다. 그리고 병력이 모자라는 상황에서도 원병 300명을 제주에 보냈다.

이경록 목사는 오히려 제주에 있는 군사들을 훈련시켜 바다를 건너가 왜적과 싸울 계획을 세웠다. 이에 대해 선조실록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제주목사 이경록이 ‘군사 200명을 뽑아 바다를 건너 적을 토벌하고자 조정의 하명을 청합니다.’하고 장계를 올리자, 비변사(조선 최고의 의결기관)가 답하기를 ‘조그만 섬이 현재까지 온전할 수 있었던 것은 적이 아직 침범하지 않았기 때문일 뿐. 만일 적이 침범한다면 섬의 힘만으로 지킬 수 있을까 걱정이 되는데, 주장(主將)이 진(鎭)을 떠나 바다 건너 천리 길을 올 수 있겠습니까. 이경록의 충분(忠憤)은 가상하나 형편상 행하기 어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후 이경록은 제주성 위에 제승정(制勝亭)을 짓는 등 방어시설을 정비하고, 목성인 명월진성을 돌로 쌓아 개축했다. 이경록은 1599년 초 병으로 사망할 때까지 7년 가량을 재임함으로써 최장기간 제주목사 직을 수행한 기록을 남겼다. 또한 여느 목사들의 재임기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장 오랫동안 제주목사로 재임했고, 마지막까지 제주의 방어시설을 돌보다 병사했다.

왕조실록에 의하면, 이경록 목사 후임으로 온 성윤문 목사는 기생 하나를 두고 판관과 싸우고, 판관 안극효는 이뿐만 아니라 법을 어긴 채 가족을 데리고 와 갖가지 민폐를 끼쳤다. 한겨울인데도 성윤문 목사는 백성들을 강제 노역에 시달리게 하니, 결국 길운절과 소덕유의 역모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1601년 봄에는 흉년이 들어 민심이 흉흉하고 민원이 높아지자 조정에서는 성윤문 목사 등의 파직이 논의되기도 했다.

반면 ‘제주목사 이경록은 해외에 거주한 지가 7년이 되었는데 왜적의 변란으로 인해 체환할 수 없었다. 그가 나라를 위해 극히 어려운 고통을 겪었으니 가자(加資)하라.’라고 기록돼 있다. 가자란 정3품 통정대부 이상의 품계를 더 올려주던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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