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어 죽는 백성 구한 관리의 선정, 돌에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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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탐라·동도·정의현 역사문화 깃든 길
아기 바쳐 만들어졌다는 진안 할망당
영험하다고 소문나 소망 빌러 찾아와
정의현 장교 현윤경 효행 기린 정려비
황구하 어사·윤구동 목사 德(덕)도 비석에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진성 안에 있는 진안 할망당. 도내 9진성에 있는 유일한 할망당으로 영험하다고 소문나 지금도 자녀의 진학과 사업 성공을 기원하는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진성 안에 있는 진안 할망당. 도내 9진성에 있는 유일한 할망당으로 영험하다고 소문나 지금도 자녀의 진학과 사업 성공을 기원하는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수산진성 ‘진안 할망당’

도내 9진성 안에 유일하게 할망당이 있는 데서 유래한 진안할망당은 수산진성 축성과 관련이 깊다.

1439년 수산진성이 구축되는 과정에서 성을 쌓으면 무슨 영문인지 자꾸 무너지곤 했다. 마을에서는 주민들이 모두 부역을 하고 공출을 내는데 유독 한 여인은 그러지 못했다. 축성관리가 방문해 공출을 독촉하자 아기가 ‘으앙’하고 우는 게 아닌가. 여인은 집안에 공출할 게 없으니 저 아기라도 데려가라고 했다. 관리가 어처구니없어 웃어넘겼다.

그러던 어느 날 축성 현장을 지나던 한 도인이 ‘왜 주겠다는 원숭이띠 아기를 바치지 않으시오.’ 하는 게 아닌가. 지난 일이 생각 난 관리가 그 집에 가서 아기를 달라고 하니 여인은 망설임 없이 아기를 내주었다. 그리고 아기를 땅에 묻고 성담을 쌓으니 진성은 무너지지 않고 제대로 구축됐다.

어느 날 밤 아기 우는 소리가 자지러지게 들려왔다. 이를 가엽게 여긴 어떤 부인이 제사를 지내고 난 음식 퇴물을 아기 울음소리 들리는 그 자리에 갖다 놓으니 울음소리가 뚝 그쳤다. 그 후 부인은 하는 일마다 잘 됐다.

세월이 흐르며 진성 안은 신앙의 성소가 되고, 신당 영험이 좋다는 소문이 주변에 퍼져나갔다. 지금도 자녀의 진학과 사업 성공 등을 위해 인근 마을에서 적지 않은 이들이 찾아오고 있다. 단골들과 학교 측에서 할망당 주변을 정비하니, 신당의 품격 역시 되찾은 듯하다.

▲수산마을 도처에 있던 오래된 비석들

제주도에서 역사문화 깃든 비석이 많기로는 화북·조천 비석거리가 유명하다. 그곳에 못지않게 다양한 비문들을 품은 곳이 또한 수산리이다.

수산리지(水山里誌·2021)에 따르면 26개의 비석이 마을 도처에 전시되고 있으나, 18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정공궁연휼민(鄭公躳淵恤民)선정비’와 1880년 세워진 ‘군수강공우진(郡守康公祐鎭)선정비’ 등 고비 3기는 행방이 묘연하단다.

오래전 정의현 사람들은 제주목 관아를 오가기 위해 수산2리와 선비들이 순력을 다니다 쉬던 지역인 ‘선비동산’을 경유해 수산진성과 대왕산·소왕산을 거쳐 구좌읍 하도리를 지나 제주목에 이르렀다고 한다.

통행인이 많은 수산리 한질(대로) 도처에는 여러 형태의 비석들이 세워졌다. 그중에는 정의현 장교 현윤경의 효행에 대한 찰리사 이재수의 치계(馳啓: 말을 달려 임금께 올리는 보고)로 포상돼 1814년 대왕산 근처도로변에 세워진 ‘효자유향별감현윤경지정려(孝子留鄕別監玄胤慶之旌閭)’와 1823년 조정에서 효열정려(孝烈旌閭)가 내려와 세워진 ‘효열고씨지정려(孝烈高氏之旌閭)’의 비석이 지금도 행인의 이목을 끈다.

그동안 마을 도처에 산재해 있던 주요 비석들은 보호 차원에서 2018년 수산1리 사무소 동쪽 구석진 곳에 모셔져 있다. 이곳으로 옮겨와 전시되고 있는 비석 중에는 충혼비, 재일교포 후원 기념비, 특히 4·3 과 관련한 당시 경찰응원대인 ‘충남중대제1소대공덕비·복구기념비·돌아온 3인 비’등도 있다. 수산1리 사무소에 전시되고 있는 오래된 비석 2기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별견어사 황구하 선정비.
별견어사 황구하 선정비.

▲황구하 어사 지성 진민비

수산리에 소재한 가장 오래된 비석으로는 단연 ‘황구하 별견어사의 지성 진민비(別遣御使 黃公龜河 至誠賑民碑)’이다. 지성 진민비란 성심을 다해 백성을 구휼한 이를 칭송하기 위해 세운 공덕비다. 1716년(숙종 42) 굶어 죽어가는 백성들을 치제(致祭)하고자 임금이 보낸 어사가 황구하다. 치제란 임금이 보낸 제물과 제문으로 죽은 백성을 제사하고 산 백성을 위무하는 위령제를 말한다.

황구하 어사는 조정에서 가져온 조 3만여 섬을 제주 백성들에게 나눠주는 한편, 진상품인 전복의 양을 줄여 공납하도록 했으며, 진상품을 감축하고 환곡도 절반으로 줄이도록 주청해 실현시켰다. 또한, 제주유생의 전시직부를 임금께 주청했다. 제주에서 치르는 초시인 향시에 합격한 급제자는 중앙에서 보는 전시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지며, 전시에서는 탈락시키지 않고 등위만을 매겼다.

이에 황구하 어사는 제주에서 초시를 거행해 급제한 고처량(화북), 정창선(상도), 고만갑(이호)에게 전시에 응시하도록 했다. 이를 기리는 선정비가 1724년(경종 4) 이곳에 세워진 것이다. 수산리에 황구하 공덕비가 세워진 이유로는, 여느 마을보다 목사의 시혜를 많이 입은 것에 대한 보답으로 여겨진다.

▲사상 윤구동 목사 휼민선정비(使相尹公久東恤民善政碑)

사상은 은퇴한 높은 관리를 높여 부르는 말이다. 1815년 제주목사로 부임한 윤구동은 관리를 단속하고 주민을 안무하고 선정을 베푼 것으로 유명하다. 1817년 형조참의로 제수돼 제주를 떠난 윤구동 목사는, 재임 중 선정으로 이름을 남겨 제주 도처에 송덕비가 세워졌다.

1815년 외국선박이 본도에 표류됐을 때 표류민을 구휼하기 위해 민폐를 없애려 공적 자금을 사용했다. 흉년이 들자 육지에서 곡식을 옮겨와 구휼했으며, 이후 환모조(還耗租) 즉 환곡으로 2500석을 미리 준비해 흉년에 대비했다.

홍경래난(1812) 시 창의병을 일으키려던 대정현 義士 구제국과 양위국의 가문에 부역을 면제시키기도 했다. 외도동 월대, 김녕리, 화북동 비석거리 등에 윤구동 목사의 선정비가 세워져 있다.

충효 홍달한 정려비.
충효 홍달한 정려비.

▲충효 홍달한 정려비(忠孝洪達漢之旌閭)

수산1리 남쪽 세칭 효자문거리 인근에는 후손들이 조성한 아담한 ‘홍달한 정려 공원’이 있다. 당시의 수산 지경인 지금의 고성리(동유암)에서 태어난 홍달한은 일찍 부친을 여의고 모친을 봉양하며 효도를 다 했을 뿐만 아니라 모친이 죽자 여묘(廬墓), 즉 고인의 무덤 곁에 여막을 짓고 제사를 지내며 3년 동안 시묘(侍墓)살이를 했다.

또한, 부친상을 보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으로 3년 상을 추복(追服)하였다. 1720년(숙종 46) 숙종이, 1724년 (경종 4) 경종이 승하하여 국상을 치를 때마다 다랑쉬 오름 등에 제단을 마련하여 분향하고 북향재배했다. 한억증과 김윤 목사가 홍달한의 충효에 대한 행장을 조정에 알리니 정려가 내려졌으며, 영조 때의 판서 정실은 ‘홍효자전’을 지어 그를 널리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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