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어져 있을 땐 마을에 흉년이…부부석의 애틋한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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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 탐라·동도·정의현 역사문화 깃든 길
남편바위는 밤이면 서럽게 울기도
흉흉한 소문에 못 옆에 나란히 배치
장수 오누이 설화 전해져 내려오는
수산리 진빌레 동네 ‘대봉이터’
수산리 노인회관 앞 팽나무 옆에 놓여 있는 부부석. 옛날 세찬 급류에 떠내려온 부부석이 같이 있지 못하면 마을에 큰 흉년이 들거나 남편바위가 서럽게 운다는 전설이 있다.
수산리 노인회관 앞 팽나무 옆에 놓여 있는 부부석. 옛날 세찬 급류에 떠내려온 부부석이 같이 있지 못하면 마을에 큰 흉년이 들거나 남편바위가 서럽게 운다는 전설이 있다.

오래된 마을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리에는 부부의 애달픈 사연이 깃든 이전(伊全)물 설화와 (혼)착 죽은 심방과 대뱅이 이야기 등 구비전승되는 이야기도 많은 편이다. 그중 정의현의 여러 마을에서도 비슷하게 구전되는 장수설화와 수산리에서 특히 구전되는 부부석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한다.

▲대봉이 남매 이야기

수산리 ‘진빌레’동네에 ‘대봉이터’라는 곳이 있다. 이곳에 살았던 대봉이 부부는 마소를 기르며 넉넉하게 살았으나 40세가 넘도록 자식이 없었다. 용하다는 절에 가서 황소를 한 마리 시주하고 지극정성으로 빌었더니 부인에게 태기가 있었다.

기쁨에 들뜬 대봉이가 매달 소 한 마리씩 10마리를 잡아 먹였더니, 부인이 낳은 자식이 딸이었다. 딸은 체구가 유달리 크고 힘이 넘쳐 동네에서는 여장사가 태어났다고 수군거렸다. 다음 해에도 부인이 임신을 하자, 여아를 낳으면 어쩌나 해서 소 아홉 마리만 먹였다. 이번에는 기다리던 아들이었다. 지성으로 음식을 먹이니 누나 못지않게 체구와 체력이 대단했다.

오누이가 스무 살이 넘어갈 즈음 제주목 조천리에서 전도 씨름대회가 열리니, 3읍 씨름꾼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대봉이는 아들을 씨름판에 보내면서 딸도 남장시켜 아들 몰래 보냈다. 아들이 씨름왕이 될 순간, 당시에도 지역세가 있었던지 제주목 관중들이 왁자지껄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목 안 사람들이 발모둠치기로 아들을 혼내주려는 순간, 남장한 누나가 ‘목 안 서촌 출신인 내가 저 정의놈과 대결하겠소.’하고 나섰다.

결과는 황소 열 마리를 먹고 태어난 딸의 승리였다. 기가 꺾인 아들이 귀가하니, 샛길로 재빨리 집에 온 누이가 풀 죽은 이유를 물었다. 그제야 남장한 목 안 사람이 누나였다는 것을, 아버지가 힘자랑만 하던 아들이 걱정돼 몰래 누나를 보낸 것을 알게 됐다.

이리하여 아들은 인생을 사는 법도도 깨달았다 전한다. 물론 온 동네는 대봉이 오누이를 무등 태우고 흥겨운 잔치에 빠져들기도 했다. 이후 대봉이 딸 하면 제주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미인인 데다 힘이 세 함부로 추파도 못 보냈지만, 그리도 동네 총각 마음 설레게 하는 선망의 대상자였다고 전한다.

▲부부석 이야기

지금의 수산1리 사무소와 ‘학교 살리기’ 임대주택이 있는 일대에는 큰 연못이 있었다. 동쪽은 식수로, 서쪽은 우마 급수와 빨래터로 이용했다는 이 못을 마을에서는 ‘도로못’이라 했다. 옛 도로못 빨래터 바로 옆에는 오래전부터 어디선가 떠내려온 큰 바위 2개가 나란히 누워있다. 이 바위를 수산리에서는 ‘부부석’이라 부른다.

지역에서는 ‘앞 내 세 번 치면 솥뚜껑 엎어불라.’라는 옛말도 회자된다. ‘솥뚜껑 엎어불라’라는 말은 폭우가 쏟아지면 동네 계곡물이 크게 불어나니, 밥해 먹을 생각 말고 피난 갈 준비나 하라는 뜻이다.

당시의 세찬 급류에 의해 떠내려온 부부석은 지금 수산리 노인회관 앞 팽나무 옆에 다정하게 놓여 있다. 2m 20㎝ 내외의 부부석은 오래전 표선면 성읍리 좌보미오름에 나란히 있었다 한다. 여러 해를 보내며 폭우가 쏟아지고 홍수가 터지자 부부석은 앞서거니 뒤서기니 하면서 ‘쇠선동산과 웃물밭과 소싯내와 천외동’을 거쳐 이곳까지 떠내려 왔던 것이다.

하지만 부부석이 같이 있지 못한 기간에는 마을에 큰 흉년이 들거나, 도로못에 먼저 와 있던 남편바위가 밤이면 섧게 운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런 흉흉한 소문이 떠돌자 진빌레 동네에서도 천외동에서도 자기네로 부부석을 옮기겠다고 옥신각신하기도 했다.

결국 세가 큰 동네에서 부인바위를 옮겨 현재의 위치에 다정하게 놓았다. 이후부터 신기하게도 물난리나 밤에 들리는 괴상한 울음소리도 없어졌다고 한다.

효자문거리 소공원. 효자문거리에는 홍달한의 효자정려문이 있다.
효자문거리 소공원. 효자문거리에는 홍달한의 효자정려문이 있다.

▲수산리 지명에 깃든 역사문화

수산리에는 이곳만의 역사문화가 깃든 지명이 많은 편이다. 그중 몇 개를 골랐다. 사장(射場)에서 파생된 ‘사시’라는 곳은 활을 쏘던 군사훈련장이었다.

위막동산은 수산진 주변에 분포했던 수산·성산·지미 봉수대와 협자·오조포·종달 연대 등지에서 통신연락을 받아 수산진으로 중계역할을 하는 막이 있었던 동산이다.

삼셩제궤는 수산2리의 옛 이름인 곶앞(고잡) 마을들인 큰가름·통개낭물·동백낭가름 등 세 동네 사람들이 모여 협의하던 동굴이름이고, 석곽불(굴)미는 석곽분묘(石槨墳墓)의 변음으로 수산2리 사무소 서쪽 200m 지점에 있는 고려시대의 묘로 추정되는 방묘이다.

소자문으로도 불리는 효자문거리는 홍달한의 효자정려문이 있는 곳이고, 솟대왓은 수산초등학교 동쪽 길가의 지명으로 마을에 문문과의 급제자가 나오면 마을의 요지에 솟대를 세워 널리 알리고 잔치를 베풀었던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솔대왓은 병사들이 사장(射場)에서 화살대로 사용할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었던 지역이고. 사싯(四時)동산은 마을의 재앙을 막기 위한 4계절 기원제인 四時祭를 지내던 동산이다.

또앉은모르는 고성리가 정의현청 소재지이던 시절 사또(원님)인 현감이 지나가다 쉬던 동산이다. 선비동산은 선비들이 순력을 다니다가 쉬었던 높은 지역으로 이곳에 많은 선정비가 세워졌었다.

신술모르는 숲이 울창해 신이 사는 숲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근처에 신술일뤠당이 있다.

별과원(別果園)은 수산2리 사무소 서북쪽에 있는 수산방호소에서 관리하던 과원이고, 수마포는 일출봉 남쪽의 포구로 수산평에서 기른 말들을 수송했던 포구이다.

▲제주도 민속문화재인 수산본향당

2005년 제주도 민속자료(9-4)로 지정된 수산본향당은 마을의 생산(生産), 물고(物故:죽음), 호적(戶籍), 장적(帳籍) 등을 차지하는 가장 중요한 당이다.

‘올뤠모르 하로산당’이라 불리는 수산본향당은 수산1·2리, 고성, 오조, 동남, 성산리 등 여러 마을에서 본향으로 모시는 통합형 신당이다.

수산리에는 올렛모르 하로산당인 본향당을 비롯해 진안할망당, 신술(일뤠)당, 거문머들당 등이 있다.

제주도의 신당 중 민속(문화재)자료로 지정된 본향당은 수산본향당을 비롯해 송당본향당, 새미하로산당, 와흘본향당, 월평다라쿳당 등 5곳이다.

수산본향당에서는 매년 음력 1월 신과세제, 2월 영등굿, 7월 마불림제, 10월 시만국대제를 맞아 신에게 정성을 들이고, 매월 음력 이렛날, 여드렛날과 집안의 우환에 따라 당을 찾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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