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안식처 한라산, 세계 중심에 자리한 하늘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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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 ㈔질토래비 창립 5주년과 총서 창간호 출판에 따른 한라산 특집
5년 전 처음 역사문화 길 개장
도민들 격려와 성원에 힘 얻어
한라산 정상 올라 보은제 지내
어사 김상헌·이증 산신제 올려
산천단 일대 제주도기념물 지정
한라산 백록담.
한라산 백록담.

▲질토래비, 한라산 정상에서 보은제를 올리다.

㈔질토래비에서는 창립 5주년 기념식과 함께 ‘질토래비 총서 창간호’ 출판기념회를 지난 7월 9일 국립제주박물관에서 가졌다. 수많은 도민이 모여들어 질토래비가 걸어오고 갈 길을 격려하고 성원해 주었다. 

5년 전 제주돌문화공원에서 ‘돌하르방에게 길을 묻다!’라는 제목으로 세미나를 열면서 질토래비 창립을 알리고, ‘동성·돌하르방 길’을 도민과 함께 걸으며 첫 역사문화 깃든 길을 또한 개장하였다. 그동안 질토래비에서는 제주 도처의 역사문화 깃든 길들을 개장하면서 관련된 소책자들을 펴내기도 했다. 

또한, 본 지면에 ‘질토래비 제주 역사문화의 길을 열다’라는 제목으로 180회 이상을 연재해오고 있다. 코로나가 창궐할 때에는 질토래비 알림 톡방(SNS)을 통해 다양한 제주 역사문화 정보를 공유하기도 했다. 단체 알림 톡방을 통한 제주 역사문화 정보 공유는 이후 질토래비의 지속적인 사업이 됐다.

창단 이후 도민들과 함께 질토래비가 펼친 다양하고 유의미한 여정과 특히 질토래비 총서 창간호 발간은 도민들의 격려와 성원에 힘입은 바 크다. 

이에 질토래비에서는 지난 7월 21일 한라산 정상에 올라, 감사한 마음을 담아 산신제로 보은제를 올리기도 했다. 한라산신제를 위한 제물과 축문도 준비하였는데, 다음은 축문 내용의 일부이다.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인 한라산이여, 영험한 한라산신이여, 세계의 중심에 자리하신 하늘산이시여. 정성을 모아 준비한 제물을 진설하오니 부디 친림하시어 흠향하옵소서. 

늘 제주의 중심인 그곳에 계시면서 제주를 제주답게 세계를 세계답게 이어가도록 유무언의 계시를 주시고 있음에 감사드리옵나이다. 그 고마움에 보답하려 또한 님의 소리를 우주에서 듣고자 ㈔질토래비에서는 길일을 맞아 이곳 한라산 정상에 올랐나이다. 

총서 창간호 출판에 즈음하여 밝혔듯이 앞으로도 매년 질토래비 총서가 발간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또한 온 누리 백성들이 님의 품 안에서 님의 유·무언의 소리를 듣고 그 의미를 깨칠 수 있도록 지혜를 주옵소서. 이제 님의 따스한 음성을 가슴에 새기며 감사함만을 남기고 하산하겠나이다.…’질토래비 등정 길은 새벽 5시에 한라산을 천여 회 오르며 새로운 식물 333종을 밝혀내기도 했던 부종휴 선생의 흉상이 세워진 관음사 등반코스로 출발, 1982년 수많은 군인들이 산화한 계곡에 세운 원점비에 참배를 한 후 삼각봉 현수교를 거쳐 정상을 올랐다. 그리곤 수백의 내외국인이 어울리는 정상의 쉼터 높은 곳에서 백록담을 내려다보며 보은제를 지낸 후 사라오름을 거쳐 성판악으로 내렸다. 

10여 년 만에 재회한 개미목과 삼각봉, 몸 하나 지나갈 수 있는 개미목 협소한 통로 있으매 감사드리고 삼각봉의 위용에 마음이 청결해졌다. 삼각봉 아래에는 등정 역사가 깃든 대피소의 돌담집이 사라지고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2007년 나리 대풍으로 사라진 용진각 대피소는 그나마 안내판 사진 속에 남아 있었다. 용진각 계곡에 시설된 출렁다리 현수교를 지나 가파른 왕관능 계단을 올라 정상에 다가갈수록 많아 보이는 구상나무 고사목들이 온난화 기후의 참상을 실감케 했다. (사)질토래비 등정에는 한라산 정상을 3백 회 이상 오른 고수향 전문위원이 동행하였다.

질토래비가 한라산 정상에서 보은제를 올리고 있다.
질토래비가 한라산 정상에서 보은제를 올리고 있다.

▲탐라국 이래 거행된 한라산신제

아주 오래전부터 전국의 명산대천에는 신들이 깃들어 있다 하여 국가에서 제사를 지냈다. 한라산 역시 탐라국시대부터 산신제를 지내왔다. 한라산신제는 본래 한라산 정상에서 지냈다. 등정과 제례 과정에서 사람이 동사하거나 불편한 점이 많아지자 1470년(성종 원년) 이약동 목사는 ‘제주읍성 남문 밖 15리에 산천단을 마련’하여 산신제를 지내게 했다. 그럼에도 국가의 필요에 따라 한라산 정상에서 산신제와 기우제를 지내곤 했다. 일례로 1601년 어사 김상헌과 1680년 어사 이증은 제주판관과 정의현감, 대정현감, 향교의 교수 등 수많은 수행원과 함께 한라산에 올라 백록담에서 산신제를 지냈다. 

1601년 제주에서 일어난 소덕유·길운절 모반사건으로 어수선한 제주 백성들의 마음을 달래고자 선조임금이 보낸 안무어사 김상헌이 백록담 북쪽에 제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냈다. 선조임금은 ‘한라산은 해외의 명산인데 사전(祀典)에 실려 있지 않아 평상시에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마침 어사가 내려가니 따로 향축을 마련하여 제를 올리고, 제문은 지제(地祭)교(제사 담당하는 벼슬 이름으로 당시 지제교는 이수록임)가 지어 바쳐라.’하고 명령했었다. 제문에는 못된 무리들이 반역을 꾀했으나 한라산 신령님의 도움으로 음모가 일찍 드러나 평안을 되찾으니, 이에 제사를 올린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못된 무리들의 반역이란 소덕유와 길운절이 제주에 들어와 역적모의를 하다가 사전에 누설되어 관련자들이 한양으로 압송되어 처형된 사건을 이른다.(본 연재 180회 참조) 남사록(南槎錄)에 따르면 김상헌은 제주목 남문을 출발하여 병문천과 한천과 무수천을 지나 존자암에 도착했다. 날씨가 흐려지자 일행들이 존자암 뒤에 제단을 만들어 제사를 봉양하자고 제안했지만, 김상헌은 이를 거절하고 정상에 올라 제사를 지냈다.

1680년 4월에도 한라산 백록담 북쪽 제단에서 한라산신제를 지냈다. 제사의 주체는 숙종 임금을 대신한 어사 이증(李增:1628-1686)이다. 이증은 제주목의 전임목사 윤창형과 정의현감 상인첨 등의 탐욕과 부정을 조사하기 위해 제주 안핵어사 겸 순무어사의 자격으로 제주를 찾았다. 이증 일행은 백록담 분화구에서 장막을 치고 하룻밤을 묵었는데, 차가운 바람과 추위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한다. 지제교(권흠)가 지은 제문에는 그동안 제대로 제사를 봉행하지 못했음을 사죄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날의 일을 이증은 남사일록(南槎日錄)에, 김성구 정의현감은 남천록(南遷錄)에 각각 기록하고 있다. 참고로 또 한 사람의 이증은 영조 시대에 제주에 유배와 서거한 영조와 8촌지간인 왕손이다. 

한라산신은 탐라국시대부터 백성들에게 숭배의 대상이었고, 오늘날에도 구본신참(舊本新參)의 숭배 대상으로 한라신제를 새롭게 하여 올리고 있다. 2009년부터는 제주시 아라동과 한라산신제봉행위원회 주최로 산천단에서 한라산신제가 열리고 있다. 2011년에는 산천단 일대가 한라산신제단이라는 이름으로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제67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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