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농민 항일정신 의식화·해녀 저항운동 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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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 항일운동가 한원택
한석영, 조천 만세운동 항일 활동…대통령 표창 추서
한석화, 조천리 출생…조천 만세운동 당시 항일 활동
한억증, 제주목사…연무정을 주성 동문 밖으로 이설
한영섭, 조천면 함덕리 출신…항일운동 참여해
한원택, 제주 혁우동맹 등 항일·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한응호, 제주목사…오등촌 남학당·상가촌 서학당 개설
한원택은 제주 혁우동맹과 야체이카의 항일 운동을 펼쳤다. 사진은 지난 1월 제주해녀항일운동 제91주년을 맞아 제주시 구좌읍 해녀박물관 해녀항일운동기념탑 광장에서 열린 제주항일운동추모제에서 해녀들이 만세 삼창을 하고 있는 모습. 제주일보 자료사진.
한원택은 제주 혁우동맹과 야체이카의 항일 운동을 펼쳤다. 사진은 지난 1월 제주해녀항일운동 제91주년을 맞아 제주시 구좌읍 해녀박물관 해녀항일운동기념탑 광장에서 열린 제주항일운동추모제에서 해녀들이 만세 삼창을 하고 있는 모습. 제주일보 자료사진.

▲한석영(韓晳瑛):1897(광무1)~1964, 기미년 조천 만세운동 당시의 항일 활동. 일명 한석영(韓哲瑛). 본관은 청주, 
한윤택(韓允澤)의 장남, 함덕리에서 출생하였다. 이 3·1운동으로 1심에 기소된 자는 모두 29명이다. 
그는 동년 4월 26일 광주지법 제주지청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 3·1절 기념일에 즈음하여 독립유공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한석화(韓錫化):1898(광무2)~1959, 기미년 조천 만세운동 당시의 항일 활동. 본관은 청주.
한희병(韓熺柄)의 장남, 조천리에서 태어났다. 조천 지역에서 항일 운동의 도화선은 김시학(金時學)의 아들이며 기미년 만세를 이끈 김시범과 김시은의 조카인 김장환이었다. 

▲한억증(韓億增):1698(숙종24)~?, 문신. 제주감진어사(濟州監賑御史) 및 제주목사. 자 대숙(大叔), 본관은 청주, 한중희(韓重熙)의 아들이다. 
1733년(영조9) 문과 식년시에서 병과로 급제, 벼슬은 삼사·승지·대간 등을 역임하였다. 1746년(영조22) 3월에 제주감진어사로 파견, 내도하여 기민을 돌보았다. 
동년 6월, 유징구(柳徵龜)의 후임 목사로 제수되어 상하 각반으로 시재를 하게하고, 천역을 쇄환하였으며 마대(馬隊) 일초(一哨)를 가설, 국방에 대비했다. 
또 연무정(演武亭)을 주성 동문 밖(현 제주동교 자리)에 이설하였고 1747년 11월에 떠났다. 

▲한영섭(韓永燮):생몰년 미상. 조천면 함덕리 출신. 항일운동 관계로 사망. 

한영섭 항일동지비(함덕리사무소 앞).
한영섭 항일동지비(함덕리사무소 앞).

▲한원택(韓遠澤):1911~1935(일제강점기), 제주 혁우동맹과 야체이카의 항일활동.
정부는 고인이 공훈을 기리어 200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본관 청주, 구좌면 종달리 태생이다. 
한원택은 1933년 2월 28일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징역 1년 언도를 받았다. 옥고로 몸이 피폐되어 앓다가 출옥 후 2년 만에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혁우동맹원들은 당시 구좌면 지역의 현안이었던 제주도 해녀 어업조합의 해녀 수탈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즉 1930년 9월 20일에는 구좌읍 세화리 김시화(金時和)의 방에서 신재홍(申才弘)·오문규(吳文奎)·김순종(金順鍾)·김시곤(金時坤)·한향택(韓香澤) 등이 집결하여 농촌의 청년과 해녀를 포섭하고 하는 방법에 대해 협의했다. 
그리고 1930년 10월에는 신재홍, 한원택, 채재오(蔡載五) 등이 모여서 당시 발생했던 성산포 해녀사건의 문제점을 비판했다. 
신재홍이 구좌의 책임자로서 1931년 11월 종달리 한향택을 제주도 야체이카의 당외분자로 가입시키고 또 한향택·신재홍 주도 아래 채재오·한원택·고사만 등과 같이 종달리 농민조합 창립총회를 개최하기로 협의, 농민의 항일정신을 의식화했다. 
제주도 구좌면 세화리에서 해녀 항일운동이 일어나 제주경찰서에서는 세화리, 하도리, 종달리, 연평리를 중심으로 남녀 근 1백 명을 검속하여 일부는 석방하고 일부는 민중운동자 협의회(民衆運動者協議會)라는 비밀결사를 통하여 배후에서 책동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해녀들은 다시금 1월 13일 구좌면과 성산면 6개 동리에서 천여 명의 해녀들이 모여서 제2차 저항운동을 일으켰다.
 때마침 순시하던 제주도사(濟州島司)를 포위하고 해녀조합에 대한 지정 판매와 10여개 조건을 들어 진정하고자 했다. 
경관들이 제지하자 만세를 고창하면서 항일 운동을 일으키므로, 제주경찰서에서는 각 주재소 경관들을 비상소집, 무장 경관대를 편성한 후 남녀 백여 명을 검거했다. 
1932년 1월부터 수차례에 걸쳐 일어난 동 3월 항일 투쟁의 배후 인물이 탄로되어 배후인물로 지목된 종달리의 야체이카 회원 8명이 피검됐다. 
이들의 면모를 보면 한향택을 비롯해 한기택, 한원택, 한영택, 채재오, 강태일, 고사만, 강종달 등이다. 

▲한응호(韓應浩):생몰년 미상, 무신. 제주목사. 1832년(순조32) 2월, 이예연(李禮延)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834년 7월에 떠났다. 
또 1833년 봄에는 오등촌(梧登村)에 남학당(南學堂)을, 상가촌(上加村)에 서학당(西學堂)을 개설하였다. 이는 전임 이예연 목사가 좌학당·우학당을 세운 후속 조치라고 볼 수 있다. 
관덕정을 중수하고 남취(南鷲)에 과수원을 설치, 각장(各場) 사이를 축장하고 또 포정문布政門 밖에 하마비를 개건했다. 
백성들에게 감저를 심도록 권장하여 흉년에 대비하였다. 도민의 기아를 구휼하여 그에 대한 추사비(追思碑)가 세워졌다.
 1832년 연희각(延曦閣) 동남쪽에 공제당(共濟堂)을 중수하여 군관의 거주처로 했다. 
동년 가을에 곡식 6백여 석을 준비하여 환모곡(還耗穀)으로 충당하고 또 820석을 기민에게 지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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