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처럼 감동적인 파노라마, 지구상에 많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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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 ㈔질토래비 창립 5주년 및 총서 창간호 출판에 즈음한 한라산 특집

한라산 최초 등정 기록 ‘남명소승’…임제 “신선이 사는 선계”
겐테, 한라산 오른 첫 외국인…신축민란 등 긴장된 상황서 등반
백록담 정상에서 “내 생애 최고 영광” 감격…산 높이 등 측정도
한라산 백록담 북벽 주변에 펼쳐진 아름다움 풍광.
한라산 백록담 북벽 주변에 펼쳐진 아름다움 풍광.

▲산정호수 백록담을 보며

질토래비가 산신제를 올린 장소는 백록담이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오래전 산신제는 백록담 안 동북쪽 제단에서 올렸으나, 지금은 백록담 출입이 엄격히 금해져 있다. 둘레 1.7㎞, 깊이 100여m 화구인 백록담은 늘 물이 고이는 산정호수이다. 한라산 정상을 밟은 이는 목책 너머로 보이는 백록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환희에 젖을 것이다. 

특히 최근 내린 폭우로 만수 절경의 백록담은 탐방객들에게 방전된 에너지를 채워주고 있었다. 백록담에 내린 눈은 늦봄까지 녹지 않는다. 이런 풍경을 제주 선인들은 녹담만설(鹿潭晩雪)이라 칭했다. 한라산 천연보호구역은 1966년 천연기념물(182호)로, 1970년 국립공원으로, 백록담은 2012년 국가지정문화재 명승(90호)으로 지정됐다. 이렇듯 한라산은 영험하고 신령스러운 산이기에, 제주에 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라산을 동경의 대상으로 여겨 등정기도 썼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최초로 기록한 이는 백호 임제(林悌, 1549~1587)이다.

▲한라산 최초 등정 기록인 임제의 남명소승

풍류남아 임제는 1577년(선조 10) 과거급제를 부친(제주목사 임진)에게 알리려 전라도 강진, 완도, 백도를 거쳐 조천포구에 도착해 조천관에 묵었다. 어사화 두 송이와 보검 한 자루, 거문고 등을 지참한 임제는 향교의 문묘에 참배를 올린 후 본격적인 제주기행에 나섰다. 별방진성에서 말을 능숙하게 타는 여자 기병을 신기하게 바라본 임제는 성산포, 우도, 천지연, 산방굴사, 송악산, 명월진성 등을 돌며 본 제주의 풍광을 ‘남명소승(南冥小乘)’이라 칭한 고서에 담았다. 남명소승이란 남쪽 바다의 작은 역사라는 뜻이다. 

임제가 한라산 등반에 나섰다가 눈이 쌓여 5일간 존자암에 머물게 되는데, 그동안 주지 스님과 장수의 별인 노인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세상에 떠도는 말 노인성이란 별 / 아스라이 저 하늘 남쪽 끝에 있다하네 … 저 노인성을 옮겨다 하늘 복판에 걸어두고 / 온 천하를 장수하는 세상 만들 수 없을까”라고 읊기도 했다. 마침내 정상에 오른 임제는 한라산이 곧 신선이 사는 선계라고 여기며 다음의 시를 지었다. 

“한라산은 선계인가(漢拏乃仙符:한라내선부) / 선록이 사이로 떼 지어 노닐고(中有仙鹿群:중유선록군) / 털은 서릿발과 눈처럼 하얗고(白毛若霜雪:백모약상설) / 도화문 점점이 박혔는데(點點桃花文:점점도화문) / 세인은 만나볼 수 없기에(世人不可見:세인불가견) / 머리 돌려 허공에 뜬 구름만 바라보네(回首空烟雲:회수공연운) … ”

한라산에 오른 최초의 외국인 겐테(독일).
한라산에 오른 최초의 외국인 겐테(독일).

▲한라산 오른 최초의 외국인 겐테

제주는 2002년 생물권보전지역 지정, 2007년 세계자연유산 등재, 2010년 세계지질공원 인증 등 유네스코 3관왕을 차지했다. 세계가 제주를 보물섬으로 인정한 것이다. 그 중심에 거룩한 한라산이 있다. 1901년 한라산을 오르기 위해 어렵사리 제주를 찾은 외국인이 있었으니, 그가 독일의 지리학자이자 기자였던 지그프리트 겐테(Siegfried Genthe, 1870~1904)이다. 그는 한라산의 높이, 해안 둘레, 정상에서 해안까지의 직선거리 등을 현재와 유사하게 측정했다. 겐테의 한국 여행기는 그의 사후인 1905년 동료에 의해 ‘독일인 겐테가 본 신선한 나라 조선, 1901년’이란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다음은 그중 한 대목이다. “이처럼 형용할 수 없는 방대하고 감동적인 파노라마가 제주의 한라산처럼 펼쳐지고 있는 곳은 분명 지구상에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독일 쾰른신문사의 동아시아 특파원이었던 겐테는 중국의 아편전쟁을 취재하러 일본에서 중국으로 가던 중 제주 근해를 지나다, 바다 한가운데 우뚝 솟은 한라산을 보고는 탐험 충동에 사로잡혔다. 당시 제주도는 신축민란(이제수의 난)의 한복판에 있었다. 중국 산둥반도를 출발한 겐테는 금강산도 구경했지만, 바다에서 본 한라산을 잊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그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신축민란을 조사하러 갈 왕실고문인 외국인(샌즈)의 친서를 휴대할 사람으로 그가 적합했기에, 겐테는 다행히 제주도로 향할 수 있었다. 제주목사 이재호는 겐테의 한라산 등반을 적극 만류했다. 외국인이 한라산에 오르면 신의 노여움으로 태풍이 불거나 폭풍우가 몰아친다는 속설도 있었거니와, 당시 신축민란으로 외국인을 적대시하는 분위기가 팽배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긴장된 상황도 겐테의 결심을 꺾을 수 없었다. 

결국 제주목사는 파발마를 띄워 한라산을 측정하기 위해 외국인이 들어왔음을 알렸다. 또한 산행에 필요한 통역관, 짐꾼, 마부, 안내자 등 12명을 동행케 했다. 겐테는 해발고도를 측정하면서 ‘남조순오름’을 지나 영실의 옛 등반로를 따라 정상으로 향했다. 밤이 되자 겐테 일행은 벌목꾼들이 기거하는 동굴에 합류했다. 추위와 외국인에 대한 적대감 등을 인지한 겐테는 가방 속에서 술병을 꺼내 마시곤 짐꾼들에게도 권했다. 생전 처음 마신 독한 서양 술이 동행인들의 얼어붙은 몸과 마음을 녹여주었다. 다음은 그의 기록이다. “꼬냑은 조선인들에게 악마의 화신이 마시는 영약처럼 느꼈던 모양이다. 이 프랑스 술은 조선 술 일만 잔을 마신 것과 같다고도 했다. 그렇게 해서 동굴 안에는 평화롭고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잔뜩 긴장되고 도둑 소굴처럼 살벌했던 동굴 안은 어느덧 요정과 난쟁이들이 함께하는 목가적인 분위기가 되었다. 모든 불신은 사라지고 이 순간 난, 한라산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사람이 된 것이 분명했다.”

한라산 왕관능.
한라산 왕관능.

다음 날 겐테 일행은 오백장군석을 보고 남벽 등반로를 따라 한라산 정상에 올랐다.  “드디어 정상이다. 분화구 바닥에는 별로 크지 않은 호수가 반짝이고 있었다. 주민들은 호수가 상당히 깊어 그 아래에 지하세계로 가는 통로가 있다고 주장했다. 사방으로 웅장하고 환상적인 장관이 한눈에 들어왔다. 오랜 떠돌이 생활 속에서 내가 결코 보지 못했던 아주 독특한 것, 아주 위대한 것을 오늘 체험했다. 여태껏 백인은 한 번도 오르지 못한 한라산 등정은 내 생애 최고의 영광이 될 것이다.”

 백록담 정상에 선 겐테는 무수은 기압계를 이용하여 가장 가파른 분화구 가장자리를 측정했다. 6390피트 즉, 1947.67m가 최초로 측정된 한라산의 높이이다. 1915년 일제강점기 전국 토지 측량 당시에는 1950m, 최근의 위성항법장치(GPS)로 잰 한라산의 높이는 1947m이다. 이렇듯 제주의 가치를 먼저 알아보고 그 가치를 세계에 널리 알린 인물인 겐테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또 한 사람의 외국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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