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 영봉 산허리 휘돌아 감은 환상의 숲길
한라 영봉 산허리 휘돌아 감은 환상의 숲길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188) ㈔질토래비 창립 5주년 및 총서 창간호 출판에 즈음한 한라산 특집

80여㎞ 이어진 한라산 둘레길
기이하고 아름다운 숲과 자연 제주의 역사·문화·유물 만나
곡식 찧던 큰 통나무 ‘남방아’ 수눌음과 옛 여인들의 삶 읽혀

▲한라산 둘레길을 가다

한라산 둘레길은 한라 영봉의 산허리를 휘돌아가는 80여㎞의 환상 숲길이다. 질토래비 답사팀은 길일을 택해 해발 600~800m 고지에 형성된 둘레길 중 역사문화 흔적이 꽤 있다고 알려진 곳을 찾아 나섰다. 

그 길은 1100도로에 접한 서귀포자연휴양림에서 출발해 ‘동백길’을 거쳐 ‘수악길’의 일부 지점인 5·16도로변에 이르는 30여㎞의 여정이다. 이 길에서 만난 주요 유물유적으로는 오래된 산담과 신문, 무오법정사지와 사당인 의열사, 논농사용 하원 도수로, 일제강점기 병참로(하치마키=머리띠 도로), 시오름 4·3 윗 주둔소, 화전마을 숯 가마터, 표고버섯 재배지 흔적,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목재소 추정지, 이름 없는 오름의 산정호구호, 10소장의 상잣성 등이다. 

용암이 만들어낸 기암괴석과 무성한 수림과 벗하며 반은 낙엽 깔린 평탄 길을, 반은 울퉁불퉁한 돌길을 10여 시간 걸었다. 동백나무·황칠나무·편백나무 군락지도 만나고 크고 작은 10여 개의 계곡과 주변의 자연 비경 또한 만났다. 등정길에 이어 둘레길에도 세계유산해설사이자 질토래비 고수향 전문위원과 동행하였다. 

시작점인 휴양림에는 3㎞쯤의 숲길 산책로가 자동차 도로와 함께 조성돼 있었다. 탐방객들이 숲과 더불어 여가를 즐길 수 있도록 편의시설도 갖춰 있었다. 산책로 주변에는 꽤 넓은 묘역도 몇 있었다. 제주에서는 묘를 산이라 부른다. 무덤이 망자의 집이라면 산담은 망자의 집을 에워싼 울타리이고, 묘역 공간은 망자의 마당이자 정원이다. 그래서 산자의 집을 양택이라, 망자의 집을 음택이라 부르는 가 보다. 

그곳 묘역에는 산담이 무너지지 않도록 네 귀퉁이에 놓인 어귓돌과 영혼이 드나드는 신문(神門)이 원형으로 남아있었다. 다만 무덤 주변에 있음 직한 동자석과 비문 등 오래된 석물들이 없어진(?) 것이 유감이었다. 

비문이 없는 산에서는 신문의 위치로 남녀를 구분하기도 한다. 망자의 앉은 자리에서 신문이 왼쪽에 있으면 남자, 오른쪽에 있으면 여자이다. 산담 지경을 살피며 걷다 보니 이내 휴양림산책로가 계곡으로 이어진다. 

한라산 둘레길 중 동백길 입구.
한라산 둘레길 중 동백길 입구.

계곡을 건너면 ‘무오법정사 가는 길’이란 표지판도 보인다. 주변 계곡 풍경이 무척 낯이 익다. 항일운동의 발상지인 무오법정사 주변을 수차례 다니면서 보았던 그 계곡이다. 1918년 10월 일제에 의해 파괴된 무오법정사 항일운동발상지도 둘레길 가까이에 있었다. 
동백나무들이 20여㎞에 걸쳐 자생하고 있는 동백길로 향했다. 이번 둘레길 여정에서 살피려 한 것은 동백길과 수악길에 산재한 역사문화의 흔적들, 그중에서도 일제의 하치마키 병참로와 일제가 남긴 기계류의 용도 등이다. 그리고 박물관에서 본 남방애를 만들 만큼 큰 나무들도 있는지 주의 깊게 살피며 걸었다. 

▲한라산 통나무로 만든 남방아

원시림으로 뒤덮였던 오래전의 한라산을 그려보며 둘레길을 걷고 또 걸었다. 필자가 걸었던 한라산 어디에서도 남방아를 만들 만큼의 큰 통나무는 별로 보이지 않았다. 그에 반해 한라산 자락에 울창한 산림이 있었음을 알리는 역사적 유물과 기록이 적지 않게 남아 우리를 들뜨게 한다. 바로 한라산 통나무로 만들었던 ‘남방아(애)와 남도고리’라는 유물과 이와 관련한 기록들이다. 

남방아란 ‘나무로 만든 방아’를, 남도고리는 ‘함지박’을 뜻하는 제주어다. 특히 남방아는 한라산 도처에서 벌채한 통나무에 커다란 홈을 파고 그 가운데에서 곡물을 도정하던 생활도구이다. 직경이 80~150㎝, 높이는 50~70㎝에 이를 정도의 커다란 통나무로 만들어진 도구가 바로 남방아다. 

지금은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남방아를 예전에는 마을마다 여러 개 장만해 수눌음으로 사용했다. 1차 산업이 주를 이루던 1960년대, 마을마다 곡식을 탈곡하는 정미소가 있었고, 정미소가 들어서기 전에는 곡식을 도정하는 도구인 남방아가 마을마다 있었다. 그러나 남방아를 만들던 수백 년 자란 통나무들은 일제에 의해 대부분 벌채되고, 4·3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통나무를 양산하던 한라산은 더욱 야위어 갔다. 

표고버섯도 재배하고 숯도 굽고 땔감도 얻어야 하겠기에 한라산이 품은 오름들 역시 민둥산이 되어 갔다. 

그러나 한라산 자연생태계는 기대 이상으로 복원력이 튼실하고 대단하다. 반백 년이 지난 한라산에는 수림이 울창하다. 남방아를 만들 만큼 커다란 나무들이 자라는 한라산을 이젠 그려질 것이다. 남방아를 만드는 나무로는 주로 느티나무(굴무기), 벚나무(샤오기), 소나무, 산벚나무, 구실잣밤나무, 조록나무 등이라 전한다. 

반면 나무질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팽나무는 목재로 쓸 용도가 적기에 살아남아 제주 도처의 신목이나 풍치목 등으로 아름드리 풍경을 연출하고 있으니, 나무의 운명도 쓰임새에 따라 가지가지인 셈이다. 

▲남방아에 대한 기록들과 수눌음

남방아(남방애·남방에·남방이로도 불림)에 대한 다양한 기록들을 모아본다. 기묘사화로 1520년 제주에 유배 와서 이듬해에 제주에서 절명한 충암 김정은 제주 최초의 풍토서로 알려진 ‘제주풍토록’를 남겼다. 충암 선생의 풍토록에 기록된 ‘유구무용(有臼無舂)’이라는 구절에서의 구(臼)는 남방아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원진 제주목사가 제주선인 고홍진의 도움으로 1653년 편찬한 탐라지에도 ‘제주도에는 디딜방아, 즉 침대(砧碓)는 없다. 오직 여인네들은 목구(木臼)에서 곡식을 찧는다(無砧碓 唯女人手擣木臼)’라는 기록이 들어있다. 충암 김정이 지적한 구(臼)와 이원진 목사가 지적한 목구(木臼)는 다름 아닌 남방아인 것이다. 

국어대사전에는 남방아를 ‘제주도에서 볼 수 있는 나무 방아통이다. 네모지고 나지막한 받침 위에 70~150㎝의 함지박 모양의 나무통을 붙이고 여기에 지름 20cm, 깊이 20cm가량의 돌절구를 끼워 넣은 뒤 나무공이로 곡식을 찧는다’라고 뜻풀이하고 있다.
 
제주민속학자 고광민은 ‘제주도구(2022년)’라는 책에서 남방애에 끼워 넣은 돌절구를 방에혹, 나무공이를 방앳귀로 불리어온다고 전하면서, ‘제주여인들은 하나의 남방애에 세 사람 또는 다섯 사람이 둘러서서 방앳귀가 부딪치지 않게 간격을 맞추어가며 겉곡을 찧거나 알곡을 빻았다’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남방아 노래인 ‘저가(杵歌)’에 대해 1765년 편찬된 증보탐라지(김영길 번역본)에서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노역하는 일은 대개 여자가 한다. 두세 사람이나 네댓 사람이 함께 같은 남방아를 찧으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음조가 매우 곤고(困苦)하게 느껴진다(凡勞役之事皆使女 或二三人 或四五人 擣一臼 必發相杵之歌 音調甚苦).” 

위의 글에서 보듯 남방아는 당시의 사람들에겐 흔한 생활도구였다. 수눌음 역시 당시 일상화된 제주여인들의 삶이었음도 읽힌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