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帝의 무차별 벌목…한라산 원시림엔 깊은 상흔
日帝의 무차별 벌목…한라산 원시림엔 깊은 상흔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189) ㈔질토래비 창립 5주년 및 총서 창간호 출판에 즈음한 한라산 특집

고려·조선시대 대량 벌채 기록 
선박 건조·건물 신축 등 사용

숯 가마터 목탄 연료 생산기지
표고버섯 최적지…산림 훼손도

日, 조직적으로 수많은 나무 잘라
 중산간 허리엔 ‘하치마키 병참로’
1940년대에 축조된 숯 가마터는 1970년대 초까지 목탄 연료의 생산기지 역할을 해왔다.
1940년대에 축조된 숯 가마터는 1970년대 초까지 목탄 연료의 생산기지 역할을 해왔다.

▲한라산 원시림 벌채 관련 기록

한라산의 나무들을 가장 먼저 대량 벌채했던 사례는 1273년(고려 원종 14)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별초를 쫓아 1273년 입도한 몽골은 일본 정벌용 선박 건조에 쓸 목재를 구하기 위해 한라산을 비롯한 제주 도처의 나무들을 대대적으로 벌채했다. 조선시대 때는 선박을 건조하고 건물을 신축하기 위해 한라산의 나무들을 잘라냈는데, 나무 벌채에 동원된 사람들에게 조선조정에서는 세금을 면제해주기까지 했다고 전한다. 이와 관련된 기록들을 아래에 몇 모았다. 

1058년(문종 12) “탐라와 영암에서 목재를 베어 큰 배를 만들고 장차 송나라와 통상하고자 했다”라는 내용이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등에 실려 있다. 1268년(원종 9) 몽골이 고려에 보낸 조서에는 고려가 배 1천척을 건조했다는 기록에 더해 “만약 탐라가 조선역(造船役)에 참여하였으면 번거롭게 할 필요가 없지만, 참여하지 않았다면 별도로 배 1백척을 만들게 하라”고 지시한 기록도 있다. 1274년에는 대선 3백척을 전라와 탐라 두 곳에서 건조토록 하였는데, 그 전년도에는 백성들이 전함을 만드는 노역에 동원돼 농사를 제때 짓지 못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1280년(충렬왕 6) 어명으로 3천척의 배를 만드는데 탐라에서 재목을 공급하라고 지시한 기록도 있다. 1281년에도 탐라에서 배를 건조하도록 지시한 기록, 1283년에는 탐라에서 향장목(香樟木)을 구해 간 기록, 1285년 탐라에서 일본 정벌용으로 만든 배 1백척을 고려에 바쳤다는 기록도 있다. 1469년 ‘한라산에서 생산되는 것은 안식향·이년목·비자·산유자 등의 나무와 선박의 재료 등인데, 근래에 산 근처에 사는 무리배들이 이득만을 좇아 서로 다투어 나무를 베고 개간해 밭을 만드니 거의 헐벗었습니다. 지금부터 나무를 베거나 새로 개간하는 것을 금하십시오’라며 화전 일구는 것을 금한다는 기록도 보인다. 

특히 1905년 제주도를 방문해 ‘조선의 보고(寶庫) 제주도 안내’라는 책을 펴낸 일본인 아오야기는 ‘한라산의 남면에는 떡갈나무, 메밀잣밤나무 등의 노목대수(老木大樹)가 울창하여 대낮에도 어두운 산림을 이룬다. 도민이 사용하는 뗏목과 연료는 물론, 공예 기술자가 필요로 하는 재료는 모두 이 산림에서 벌채되며, 그 수목은 거의 무진장이라 할 만큼 많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1935년 제주를 찾았던 이즈미 세이이치도 ‘한라산의 상록활엽수가 해안선까지 1900년경에도 뻗어 있었다’라고 전해 들은 이야기를 적고 있다. 

이러한 기록과 증언으로 보아 한라산의 산림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급속도로 훼손되었다고 판단된다. 일제는 한라산 도처에서 베어진 나무들을 이용하여 표고버섯을 재배했으며, 벌채된 나무들을 실어 나르는 임도(林道)도 도처에 만들었다. 벌채한 나무들을 한 곳에 모아 다시 손질하는 제재소(다음 호에 소개)도 한라산에 세웠었다. 특히 일제는 결7호작전의 일환으로 1945년 초 한라산 곳곳에 낸 기존의 임도들을 연결하는 100여㎞의 군용도로인 하치마키 병참도로를 내며 원시림들을 벌채하기도 했다. 

▲숯 가마터와 표고버섯 재배지

한라산 난대림 지역의 대표적인 수종인 동백나무는 특히 서귀포자연휴양림에서 5·16도로변까지 약 20㎞에 걸친 지경에서 우리나라 최대 군락지를 이루고 있다. 이에서 연유된 한라산둘레길 코스 중 하나가 동백길이다. 동백길을 걷다보면 주변을 에워싼 나무들을 이용하여 숯을 굽던 가마터와 표고버섯 재배지도 만날 수 있었다. 돌과 흙으로 1940년대에 축조된 숯 가마터는 1970년대 초까지 목탄 연료의 생산기지 역할을 해왔다. 동백길 숯 가마터의 화구 입구는 아치형으로 50㎝ 내외, 위쪽에도 30㎝ 정도의 구멍이 나 있다. 허물어질 거 같은 입구지만 전체적인 외관은 숯가마 틀을 양호하게 유지하고 있다. 현무암으로 쌓아 올린 숯 가마터는 외벽의 석축 상태도 비교적 잘 남아있어 가마의 구조와 축조기법 등을 파악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하지만 숯가마 위에 나무가 자라면서 장기적으로 가마가 무너질 염려가 있어 보인다. 

한라산은 겨울철에도 습도가 높아 표고버섯처럼 수분을 많이 필요로 하는 식물이 자라기에 매우 유리한 조건이다. 제주에서는 해발 900고지 이상에서도 영상의 기온과 적당한 습도를 유지하기 때문에 찰지고 두꺼운 갓을 형성하는 최상급의 표고가 자란다고 한다. 제주에서는 지금도 주로 중산간 이상의 고지대에서 자연과 유사한 조건에서 버섯이 재배되고 있다. 

일제가 한라산에 만들었던 하치마키 병참로의 흔적.
일제가 한라산에 만들었던 하치마키 병참로의 흔적.

▲한라산 원시림 수난과 일제

한라산 총서(한라산 생태문화연구소, 2006)에 의하면 한라산 산림 훼손 중 가장 큰 원인은 한라산이 원시림 벌목장소와 표고버섯 재배장소로 활용되면서부터라고 한다. 한라산에서의 표고버섯 재배는 1906년 동영사(東瀛社)를 조직한 일본인 후지타 등에 의해 처음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라산 일대가 모두 표고버섯밭이었을 정도로 버섯 재배가 성황을 이뤘다고 한다. 

또한 한라산의 원시림을 벌목하려 제주에 영림서(營林署)를 설치한 일제는 1915년부터 1930년대까지 한라산 남부의 벌목지구에 일본인 관료를 책임자로 두고 조직적으로 수백만 본을 벌채했다. 그리고 1945년 초 결7호작전의 일환으로 한라산 900고지 위아래를 휘둘러 100㎞ 길이의 세칭 하치마키 도로를 조성하며 주변의 수많은 원시림을 벌목하였다. 1945년 3월 미군의 상륙에 대비해 어승생악 일대에 병력을 주둔시킨 일제는 어승생악을 중심으로 한라산 중허리에 머리띠를 두른 듯이 병참로가 만들어졌다 하여 이 도로를 ‘하치마키’라고 불렀다. 영실·법정악·수악교·논고악과 성판악·물장오리·관음사·천왕사 등지로 이어진 하치마키 도로는, 군사용 목적과 더불어 임산자원을 수송하기 위해 만든 임도로 판단된다. 

탐라교육원에서 자라고 있는 ‘영송(靈松)’.
탐라교육원에서 자라고 있는 ‘영송(靈松)’.

▲한라산 영송(靈松)

제주에는 ‘영송’이라 불리는 특이한 나무가 한라산 1100도로변(광령리 산183-1)과 탐라교육원 두 곳에서 자란다. 1100도로변 영송은 높이가 1m, 둘레가 20m로 수령이 수백 년이라 전한다. 

전설에 의하면 한라산 신령이 타고 다니던 사슴이 죽자, 산신은 사슴의 넋을 달래다 그만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그렇게 아끼던 사슴이 옆에 와서 드러눕는 게 아닌가. 산신은 살아 돌아온 사슴의 등을 한없이 쓰다듬었다. 그리고 다음 날, 사슴이 누웠던 자리에서 산신은 사슴 대신에 소나무를 보았다. 사슴이 환생한 나무라 여긴 산신은 밤마다 찾아와 사슴을 대하듯 소나무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래서인지 소나무는 위로 자라지 않고 자꾸만 옆으로 뻗어 나갔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소나무를 사슴 소나무 또는 누운 소나무라고도 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1100도로변 영송은 관리 소홀로 고사하고 있는 중이다. 반면 탐라교육원 영송은 사진에서 보듯 여전히 푸르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