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되옵니다"
"아니되옵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김문기 편집국 부국장 겸 서귀포지사장

조선은 왕조국가임에도 최고 권력자인 왕에게 절대적인 권력이 없었다. 수시로 왕을 견제하기 위한 신하들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자신들이 추구하는 ‘군주상’을 당대 국왕들에게 요구했다.

왕의 입장에서는 수시로 견제구를 날리는 신하들이 곱게 보이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연산군 재위 시절에도 왕권과 신권의 대립이 극에 달했다. 임금과 신하 간 관계를 멀어지게 한 수많은 사건 중 하나를 예로 들면 ‘수륙재(水陸齋)’다. 성종의 장례식을 위해 불교식 천도재인 수륙재를 거행하고자 했지만 신하들은 조선이 유교국가라는 점을 들며 반대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조선시대 남인과 서인 간 벌어졌던 ‘예송논쟁’은 효종이 숨지자 남인과 서인 간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효종의 계모)가 상복을 ‘1년 입는 게 옳다’, ‘3년 입는 게 옳다’고 다투며 시작됐다. 당시 현종은 한동안 신하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이후 남인과 서인 모두 시차를 두고 숙청되는 단초가 됐지만 신하들은 임금 앞에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고 할 말은 했다.

조선시대 왕의 독주를 막기 위해 둔 대표적인 기관으로 왕의 잘못된 행위 등을 지적하는 역할을 하는 ‘사간원(司諫院)’을 들 수 있다. 사간원에 소속된 간관(諫官)들은 임금이 단행한 인사에 대해서도 부적절하다고 판단할 경우 목숨을 내놓고 상소를 올려 반대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임금에게 쓴소리하는 것이 사간원의 일이었기에 왕권 강화를 추구하는 왕의 입장에서는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지만 역대 왕들도 간관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군주국가에서 절대 권력자인 국왕에게 싫은 소리를 하도록 별도의 기관을 뒀다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왕과 신하는 하나라는 이념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태종 2년(1402년)에 설치된 사간원은 연산군때 잠시 폐쇄된 것만 빼면 조선시대도 내내 운영되다 1894년 갑오개혁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요즘 나라가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정부에 ‘간관’이 보지지 않는 것 같다.

노사갈등이 깊어지고 백주 대낮에 도심에서 칼부림 사건이 터지고 있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물가에 서민들의 시름도 깊어지고 있다. 악성 민원에 시달리다 스스로 숨을 끊는 교사들이 나오고 있다. 이 와중에 육군사관학교에 있는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으로 터진 이념 갈등으로 사회가 분열되는 양상이다.

흉상 이전 문제가 터지면서 ‘홍범도함 개명’도 도마에 올랐는데 국무총리와 국방부, 해군이 개명 여부를 두고 오락가락하고 있는 상황이다. ‘검토가 필요하다’, ‘현재 검토하고 있지 않다’는 말이 되풀이되는 등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용산 대통령실에서는 별다른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일본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를 바다에 방류하면서 다수 국민들이 불안해 하고 있는데 정부는 ‘과학적이고 안전하다’며 일본을 두둔하고 있다. 대통령은 시장을 찾아 “수산물이 안전하다”며 ‘먹방 쇼’를 보여주고 정부 여당 인사들도 이에 장단맞춰 수조에 든 바닷물을 먹는 모습을 국민들에게 보여주며 ‘원전 오염수 불안’을 ‘괴담’으로 치부하고 있다.

조선이 500년 왕조를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임금을 올바로 보좌한 신하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대통령이 사회 갈등을 봉합하고, 경제를 부흥시키는 다양한 정책을 펼치는 과정에서 참모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대통령도 사람이기에 잘못된 판단이나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사회 분열을 조장하는 잘못된 정책에 직을 걸고 “아니되옵니다”라고 하는 참모가 윤석열 대통령에게는 왜 없는걸까?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