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철의 색다른 제주여행] 세한도 적요로움과 세 사람 비운 스며든 추사적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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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추사 김정희와 4·3 김달삼(하)

강문석 일가 살던 추사적거지
4·3 토벌대 의해 불 타 없어져

유배인들, 문물과 격리돼 살던 
섬사람들에 정신적 영향 미쳐

유배인 추사만이 성공한 삶…
추사 연결된 세 명, 비운의 삶

강문석의 큰딸 강영애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고향 출신 오빠와 혼인했다. 두 남녀의 애정이나 부부관계가 어땠는지는 남아 있는 자료가 거의 없는 듯하다. 그러나 1945년 1월 혼인부터 1950년 3월 남편 김달삼의 죽음까지 5년 동안의 객관적 역사를 보면, 신혼부부의 사적인 행복 따위는 너무도 먼 곳에 있었을 것임은 쉽게 짐작될 수 있다. 

아버지와 남편의 신념에 얼마나 공감했을지는 모르지만, 한 남자의 아내로서 강영애는 불행했던 여인임에 틀림없다. 결혼 당시 그녀는 사업을 하던 아버지를 따라 일본 오사카에 살고 있었지만 태어난 곳은 지금의 주소로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 1661번지이다. 그녀가 태어나기 80여 년 전 추사 김정희가 7년간 유배 살았던 바로 그곳이다. 지금은 추사 유적지로 복원되어 많은 이들의 발길로 북적이는 관광 명소로 변모해 있다. 

올레 11코스 9.2km 지점인 정난주마리아묘는 대정읍 동일리에 속한다. 이곳에서 바로 옆 마을인 안성리를 향하여 2km 정도 올레 코스를 벗어나면 김달삼의 처갓집이었던 지금의 추사적거지에 이른다. 사위가 4·3사건을 주동한 빨갱이요, 집 주인도 월북한 빨갱이 집안이었으니 옛날에 추사가 살았건 어쨌건 멀쩡하게 남아 있을 리가 없다. 4·3 토벌대에 의해 집 세 채 모두 불태워 없어졌다가 35년 만인 1984년에 고증을 통해 옛 모습으로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탱자나무로 둘러싸인 추사 유배지 모습. 추사가 유배 때의 이 집 주인은 강도순으로, 강문석의 증조할아버지다.
탱자나무로 둘러싸인 추사 유배지 모습. 추사가 유배 때의 이 집 주인은 강도순으로, 강문석의 증조할아버지다.

추사적거지 안의 주거용 초가집은 모두 3채다. 안채는 증조부 때부터 강문석 일가가 살았던 곳이고, 추사는 별채에 살면서 바깥채에 유생들이 모여들면 나와서 학문과 서예를 가르쳤다고 한다. 그 외에도 제주 전통 화장실이나 방앗간 그리고 대문의 일종인 ‘정낭’ 등의 모습을 둘러볼 수 있다. 

적거지 바로 옆에는 유물 전시 공간인 추사관이 자리잡고 있다. 초가를 복원할 때 함께 세웠던 유물전시관이 낡고 헐어서 현대식 건축 양식으로 2010년에 재건립한 것이다. 유배의 땅에 세우는 기념관임을 감안하여 주요 전시실을 지하로 내렸다고 한다. 때문에 지상에서 보이는 바로는 단순한 1층 건물일 뿐이고, 주요 전시실은 지하 2개 층에 배치되어 있다. 

모조품들이 많긴 하지만 추사의 글씨와 그림과 편지 등 다양한 자료들이 상설 전시된다. 관람객들의 가장 많은 관심을 끄는 명작 ‘세한도’는 1939년 일본인 전문가가 복제해 만든 한정 영인본(影印本) 100점 가운데 하나다. 

세한도 건물을 모델로 한 제주추사관(출처=한국관광공사).
세한도 건물을 모델로 한 제주추사관(출처=한국관광공사).

‘세한도’ 그림 속의 집 한 채는 제주추사관 건물의 디자인 모델이 되었다. 네 그루의 소나무와 잣나무 사이에 낮게 앉아 있는 그 집은 안정감은 있지만 외로워 보인다. 추사관 건물은 처음 접한 이들에겐 창고처럼 단순한 모습이라 좀 썰렁하고 의아한 느낌도 들 수 있지만, 세한도 그림 속 그 집과 비교해보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조 500년 동안 제주에 귀양 온 이들은 대략 2백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가장 신분이 높았던 광해군부터 가장 나이 어린 소현세자 4살 아들까지 다양했다. 이곳까지 멀리 보낼 만큼 중죄인들이라 했지만 민형사상의 죄인들이기보단 정쟁에 휘말린 정치범들이 대다수였다. 바깥세상 문물과 격리돼 살아온 섬사람들에게 유배인들의 사상과 이념이 얼마나 정신적 영향을 미쳤을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서두에 언급된 유배인처럼 섬에서 죽어 묻힌 이들도 있었고, 추사처럼 결국은 해금되어 섬을 벗어난 이들도 있었다. 섬에는 유배인의 씨가 뿌려지면서 유사한 DNA의 후손들이 대를 잇기도 하였고, 유배인에게 배우고 익힌 이들의 정신세계가 후손들에게 대를 이어 전수되기도 하였다. 

제주 섬이 생긴 이래 가장 큰 사건을 유발시킨 김달삼이란 인물은 전자와 후자가 둘 다 해당되는 경우다. 유배인 이세번의 직계 후손이면서, 유배인 김정희에게 배우고 익힌 강도순의 직계 후손과 부부의 연을 맺었기 때문이다. 

제주 추사관에서 사람들은 ‘세한도’ 그림을 보며 감탄하고, ‘의문당(疑問堂)’ 현판 앞에서 고개를 끄덕이거나 추사의 여러 편지 글들 앞에서 애틋해 하기도 한다. 한양의 고귀했던 선비가 절해고도에서 느꼈을 외로움에 공감하다가 그 속에서 일궈낸 성취와 업적들에 큰 감동을 느끼기도 한다. 

서귀포시 대정읍 추사로 44에 위치한 추사 김정희 기념관 실내.
서귀포시 대정읍 추사로 44에 위치한 추사 김정희 기념관 실내.

그러나 정성을 다해 추사를 스승으로 모셨던 이 집 옛 주인과 그 후손들에 대한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추사의 제자가 된 증조부를 뒀기에 증손자 강문석은 좋은 환경에서 나고 자라며 넓은 세상에 일찍 눈을 뜰 수 있었고, 모자람 없이 키운 그의 딸 강영애 또한 문무를 겸비한 엘리트 청년 김달삼과 짝을 맺어줄 수 있었다. 

허나 당대의 행복이나 후세의 평가를 놓고 보면 유배인 추사만이 성공한 삶을 살았다. 추사와 직간접으로 연결되는 세 명의 섬사람들은 모두 불행한 인생이요, 세상을 잘못 만난 비운의 삶을 살았다. 

대정 추사적거지까지 먼 길을 달려온 여행자들은 초가집 한 칸에 눌러살았던 옛 선비의 고매한 정신과 예술혼을 기리다 떠날 뿐, 한때는 이 마당을 활보했을 세 명의 제주 사람들의 비운에 대해선 전혀 관심들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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