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민들 사이 추사(追思)의 노래 유행할 정도로 칭송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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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 정의현감 허승
허승, 정의현감… 동문루 기와로 바꾸고 부역 간편케 해
허유, 제주목사…황영송정사로 파면…백성들 비 세워
허엽, 오현중·고·한양대 卒… 한국남동발전 최고경영자
허종익, 대(對) 게릴라부대 신선부대장…국가유공자
허철, 대정군수…“모든 사람 입에 칭송받고 경내 편안케”
허통, 목자로 신통한 의술…전설적 의술보다 한 수 위
허희, 제주목사…김녕촌 사는 김칭 가문에 정표 내려
현경대, 오현고·서울대 법대 卒…사시 출신 5선 국회의원
현경만, 도의원… 성산포 양어장 국고 환원·실습장으로

▲허승許昇:생몰년 미상, 정의현감. 1735년(영조11) 10월, 박규환(朴奎煥)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정의현성의 동성 문루(門樓)인 동문루가 초옥인 것을 기와로 바꾸어 놓았다. 또 부역을 간편하게 하니 현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1737년 9월 뜻밖에 전출되니 도민들로부터 그에 대한 추사(追思)의 노래가 한동안 유행되었다. 한편 1737년(영조13) 김성탁(金聖鐸)이 은사의 원죄(寃罪)를 호소한 관계로 정의현에 유배되었다. 은사 이현일(李玄逸)(1627~1704)의 신원소를 올렸다가 왕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이었다.


▲허유許硫:생몰년 미상, 무신. 제주목사. 1759년(영조35) 황해수군절도사(黃海水軍節度使)로 재임 중 동년 5월, 조위진(趙威鎭)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760년 7월에 황영송정사(黃營松政事)로 인하여 파면되었으니 백성들은 이를 애석하게 생각하여 비(碑)를 세웠다. 재임 중 반찬을 줄여 굶주리는 백성을 돌보았다.

허엽
허엽

▲허엽許燁:1953~생존. 서귀포시 호근동에서 태어나 오현중․고를 거쳐 한양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해 1978년 한국전력에 입사, 이후 35년만인 2013년 한국남동발전 최고경영자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2014년부터 내리 3년 연속 대한민국윤리경영대상을 수상했다.

허종익
허종익

▲허종익許宗益:1919(일제강점기)~1975, 경찰관, 본관 양천, 일명 허창순(許昌洵), 함경북도 무산군 서하면 삼천동에서 허현욱(許賢郁)과 어머니 이씨(李氏) 사이에서 출생, 1948년 직후 제주경찰에 투신, 대(對)게릴라부대(部隊)인 신선(神選)부대장이다. 한라산의 평정, 이에 따라 제주도경찰국장 신상묵(辛相默)에 의해 1955년 9월 21일 ‘한라산 개방 평화기념비’를 건립, 공로가 혁혁해 1951년 치안국장표창, 1952년 대통령포장, 1952년 금성화랑무공훈장, 1953년 내무장관표창, 1956년 4월 11일 잔비(殘匪) 정권수(鄭權洙) 사살을 계기로 토벌부대인 신산대(神選隊)에 위문금 접수를 시작하였다. 1975년 갑자기 서거하여 조천읍 조천공동묘지에 안장(安葬), 그 후 박근혜정부에 의해 국가유공자로 선정되었다. 제주충혼묘지(濟州忠魂墓地)로 이장(移葬)하자 1951년 경감(警監) 승진, 1952년 10월 성산포경찰서장, 서귀포경찰서장을 거쳤다. 1957년 전남 순천경찰서에서 1년 반을 지냈다. 이어 광주소방서장, 1959년 공직에서 물러났다. 

한라산 개방 평화기념비(출처=한라산국립공원관리소).
한라산 개방 평화기념비(출처=한라산국립공원관리소).


▲허철許轍:생몰년 미상, 대정군수. 1899년 1월 시종원 분시어사(分侍御使)를 거쳐 1901년(광무5) 6월 6일 임명되자 강봉헌(姜鳳憲)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902년 3월 9일 원에 의해 면직되었다. 동년 8월 15일 신축민란(辛丑民亂)(이재수란)의 책임을 물어 구인되었다. 1902년 3월부터 평안도 가산군수(嘉山郡守), 함경도 이원군수, 평안도 박천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1901년 8월 군수 치적에 보면 “허철은 남김없이 진력하니 소요는 종식되고, 아전들은 간계를 행하지 못하고 모든 사람의 입에 칭송이 넘치고 경내가 편안하다.”라고 되어있다.


▲허통許通:생몰년 미상, 출생지는 애월읍, 의술인, 목자, 본시 5소장(所場) 서부의 목마장에 소속된 목자(牧子)로서 의술이 신통하여 너무나 유명했다. 명월진(明月鎭)에 살던 전설적인 월계(月溪) 진좌수(秦座首) 국태(國泰)의 의술보다 한 수 위였다고 전해진다. 오늘날 애월읍 서부지역에 의생이나 의사 출신이 많이 배출되는 이유를 허통에서 그 연원(淵源)을 찾고 있다.


▲허희許熙:생몰년 미상, 제주목사. 1487년(성종18) 10월, 이수생(李壽生)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490년 5월에 상호군(上護軍)을 제수했다. 1488년 1월 제주추쇄경차관(濟州推刷敬差官) 최보(崔溥)가 부친상을 듣고 고향으로 귀환 중 표류됐다. 1487년 김녕촌에 사는 김칭(金秤) 가문에 정표(旌表)를 내렸다.

현경대
현경대

▲현경대玄敬大:1939~생존. 제주시 노형동 출신. 오현고등학교 졸업. 서울대 법대 졸. 제5회 사법고시 합격. 전 국회의원(제11․12․14․15․16)


▲현경만玄慶萬:1904~?. 성산읍 온평리에서 태어나 성산면장 3년과 북제주군 내무과장을 지내고 1952년 5·10 초대 제주도의원 선거에 자유당 후보로 입후보, 2462표로 당선, 또 제2대 도의원 선거에 입후보하여 1240표를 얻어 당선되어 적산인 성산포 양어장을 국고로 환원, 성산수고의 실습장으로 이용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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