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철의 여행자의 인문학] 후지산 천계(天界)의 비경(祕境)은 지상의 일상
[이영철의 여행자의 인문학] 후지산 천계(天界)의 비경(祕境)은 지상의 일상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27) 일본 최고봉 후지산(하)

분화구 일대, 황량한 불모의 땅
수천 년의 세월도 지우지 못 한
화염·용암 그을림, 혹성 연상돼

해발 3776m 정상에서 수직으로
내려다보는 스루가만(駿河湾) 파란 바다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는 땀방울 때문에 원래 지참했던 생수 두 병은 이미 바닥이 났다. 다시 만나는 산장 앞에 잠시 머물며 300엔짜리 생수 한 병을 사서 단숨에 비웠다. 물 한 병에 3000원이니 고산지역인 만큼 물가도 비싼 편이다. 후지산 8부 능선, 8합목인 이곳 고라이코칸(御來光館)은 후지산 마지막 산장이다. 석식과 조식을 포함한 숙박비가 1만3500엔, 샤워도 못하는 허름한 시설에 우리 돈 13만원이니 만만치 않은 금액이다. 해발 2700m의 첫 산장 하나고야(花小屋)가 8000엔이라니 고도가 올라갈수록 숙박비도 비례함은 당연하겠다. 

지난 8월 후지산 정상 직전에서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는 DMZ생태관광협회 강석호 회장(사진 오른쪽)과 김한규 부회장.
지난 8월 후지산 정상 직전에서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는 DMZ생태관광협회 강석호 회장(사진 오른쪽)과 김한규 부회장.

후지산 요시다 루트에는 7합목과 8합목에 걸쳐 대략 열댓 개 정도의 산장들이 분포돼 있다. 얼핏 그 수가 많아 보이지만 모든 곳이 7월 초부터 9월 초까지만 오픈하기 때문에 숙박 예약은 경쟁이 치열하다. 중턱에서 숙박을 하면 1박2일 산행이라 훨씬 수월하겠지만, 우리 일행이 예약을 시도했던 한 달 전은 이미 모든 곳이 만실이었다. 어쩔 수 없이 산 아래서 숙박을 하고 새벽 3시부터 당일치기 강행군에 나선 것이다. 해발 3400m 지점이라 그런지 머리가 살짝 띵해져옴을 느낀다. 

신성한 곳의 입구에 서 있는 하얀색 도리이(鳥居, 해발 3600m)를 지나 9합목에 이르고, 다시 마지막 안간힘을 쏟아붓고 나면 요시다 루트의 종착지에 이른다. 해발 3715m의 쿠스시 신사(久須志神社)다. ‘후지산 정상 오쿠미야(富士山頂上奥宮)’라는 현판이 붙어 있고 시골 매점 같은 소박한 외양이다. 

주변 매점 앞 기다란 평상 위에 주저앉았다. 발 아래 절벽으로는 2000m쯤 고도차를 둔 새하얀 구름 세상이 낮지만 드넓게 깔려 있다. 누웠거나 양말을 벗어 말리거나 뭔가를 마시는 평상 위 열댓 명 등반객들은 공통적으로 천계(天界)를 느끼고 있을 듯하다. 이들의 편안한 표정들을 훔쳐보며 덩달아 행복해진다. 허나 아직 마음을 다 놓긴 이르다. 오하치메구리(お鉢巡り), 분화구 주변을 한 바퀴 돌아오는 3㎞ 순환 둘레길이 남아 있다. 후지산 최정상은 분화구 맞은편, 둘레길 2㎞ 지점에 솟아 있는 야트막한 봉우리다. 

평상 앞 매점 오우기야(扇屋)에서 산 물 한 병을 다 비운 후 마지막 남은 길을 나섰다. 분화구 일대는 그야말로 불모의 땅, 풀 한 포기 개미 새끼 한 마리 살지 못할 듯 황량하다. 그 옛날 화염과 용암에 불타고 그을렸을 자국들이 수천 년 세월에도 지워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기괴한 색상을 띄고 있다. 흡사 우주의 어느 혹성 위에 불시착한 느낌이다. 

정상을 향하고 있는 일본인 등반객들의 모습.
정상을 향하고 있는 일본인 등반객들의 모습.

오전 11시10분 기상관측소가 있는 후지산 정상 해발 3776m 지점에 올랐다. 새벽 3시에 후지 스바루라인 5합목을 출발한 지 7시간 만이다. ‘일본 최고봉 후지산 겐가미네(劍ヶ峰)’라 쓰인 표지봉 앞은 인증사진을 찍으려는 이들이 대여섯 명 줄 서 있다. 

정면으로는 우리가 40분 전에 지나온 구스시가다케(久須志岳 3725m)가 야트막하게 누워 있고, 그 왼편에 하쿠산가다케(白山岳 3756m)가 상대적으로 가장 높게 솟아 있다. 오른편으로는 하산하면서 지나야 할 여섯 개 봉우리들이 고만고만하게 서로 키 재기하는 모양새다. 

죠오쥬가다케(成就岳 3734m), 이즈가다케(伊豆岳 3749m), 아사히가다케(3733m), 센겐가다케(浅間岳 3722m), 코마가다케(駒ヶ岳 3718m), 미시마가다케(三島岳 3733m), 시계방향으로 서 있는 이들 여덟 개 봉우리들은 팔신봉(八神峰)으로 불린다. 정상봉 겐가미네(劍ヶ峰 3776m)를 지켜주는 여덟 호위무사들인 셈이다. 

분화구 바닥 다이나이인(大内院 3535m)은 자신의 분수를 잘 알듯 겐가미네보다 241m 낮은 위치에 다소곳이 앉아 있다. 얌전해 보이는 저곳에서 언젠가는 엄청난 불덩이를 뿜어낼지도 모른다. 1707년 호에이 대분화(宝永大噴火) 이후 아직까지 300년 넘게 조용하지만 후지산은 엄연한 활화산이다. 미래의 어느 날 일본 열도를 온통 공포의 도가니로 몰고 갈지도 모르는 것이다. 

정상 겐가미네를 내려서자 후지산에 올라 처음 보는 바다가 시야 가득 들어온다. 시즈오카시(静岡市)와 이즈반도(伊豆半島) 사이에 자리잡은 스루가만(駿河湾)이 중간중간 솜털 구름들 사이로 푸르른 자태를 뽐내고 있다. 해발 3776m 고지에서 파란 바다를 거의 수직으로 내려다볼 수 있는 지리적 조건은 지구상에서 매우 드물 것이다. 우리 인생에 흔치 않은 경험을 선사하는 것이다.      

하산은 오를 때와는 다른 길을 이용한다. 후지산 4개 등반로 중 하나인 스바시리(須走) 루트를 통해 내려가다가 중턱 삼거리에서 갈리면서 원래의 요시다 루트 초입과 만나는 것이다. 고도차 1000m 아래에 깔린 새하얀 구름 세상으로 점점 가까이 다가서다가, 구름 뚫고 내려오는 순간 수목한계선 너머 녹색의 숲 정경이 시야 가득 들어왔다. 일장춘몽, 천계(天界)에 잠시 올랐다가 지상 세계로 내려서는 순간 꿈에서 막 깰 때의 느낌이 그러할 것이다. 

후지산 정상 분화구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DMZ생태관광협회 회원들.
후지산 정상 분화구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DMZ생태관광협회 회원들.

‘후지산을 한 번도 오르지 못하면 바보, 두 번 오르면 또한 바보(富士山に一度も登らぬ馬鹿、二度登る馬鹿)’라는 일본 속담이 있다고 한다. 멀리서 보는 후지산은 멋있지만 막상 올라와보면 별것 없이 숲과 나무도 없는 황량한 풍경뿐이라 생긴 말일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후지산에서 내려다보는 지상 세계는 일상에서 쉽게 만날 수는 없는 비경(祕境)이었다.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이다. 나는 첫 번째 바보는 면했지만 두 번째 바보는 어쩐지 되어보고 싶다. 
<끝>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