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려장 효과와 제주도의 장수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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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옥 ㈔제주장수복지연구원장/논설위원

오랫동안 기다리던 청려장(靑藜杖)이 도착했다. 밝은 황토색 지팡이가 한라산의 여느 나무처럼 울퉁불퉁 정겨웁다. 맨 위쪽에 박혀진 태극기 문양이, 대통령의 선물임을 드러내며 반짝인다. ‘게무로사 이 늙은이를 제게 죽어불랜 안 해영, 촘으로 이 지팽이를 대통령이 나한티 보내시냐?(기실로 이 노인을 빨리 죽어버리라 안 하고, 진짜로 이 지팡이를 대통령이 나한테 보냈느냐)’라며 흐뭇해하시는 어머니 얼굴에, 청려장의 금빛이 아롱다롱 눈부시다. 

청려장은 명아주로 만든 지팡이다. 명아주는 밭이나 들에서 자생하는 한해살이 식물로, 몸에 지니고만 있어도 심장에 좋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 약효를 눈치 챈 효자들이 부모님께 지팡이를 만들어 드리면서 효도의 상징이 되었다. 통일신라 때부터는 임금이 장수노인들에게 하사하는 국가의 선물로 자리했다. 조선시대에는 ‘70살이 된 노인에게 임금이 내리는 것’이라 하여, 국장(國杖)이라고 불렸다. 도산서원에는 퇴계 이황이 사용하던 청려장이 보존되어 있다. 퇴계는 선조 3년에 70세로 별세했다.  

우리 정부는 1992년부터 100세가 되는 노인들에게 청려장을 선물하고 있다. 올해도 ‘노인의 날’에 100세를 맞은 노인 2623명(남자 550명, 여자 2073명)에게 증정됐다. 9월 말 기준으로 제주도의 100세 이상 인구는 남자 15명, 여자 294명, 합해서 309명이다. 증정 대상은 주민등록상 100세인 노인과 실제 나이가 100세로 명확하게 확인된 이들을 포함한다. 

어머니는 청려장을 받으신 후부터 얼굴이 화사해졌다. “이 짚팽인 잘도 개붑고, 모냥도 벨쪼여! 난 나라를 위해영 헌 게 베랑 어신 늙은인디, 이추룩 공꺼로 받앙 되카 이?(글쎄다, 이 지팡이는 아주 가볍고, 모양도 별나다! 나는 나라를 위해서 한 게 별로 없는 노인인데, 이렇게 공짜로 받아도 되겠니)”라면서, 미안하신 듯 청려장을 바라보신다. 그 사랑을 힘입은 청려장은, 어머니와 대문을 지키면서, 지나가는 올레꾼을 향해 기세 좋게 번쩍인다. 

하지만, 올레꾼들은 ‘섶섬이 보이는 풍경’을 찍어대느라, 백세 노인은 안중에 없다. 이중섭 화백의 그림으로 유명해진 서귀포 앞바다의 저 섬을, 청려장인들 무슨 수로 따돌릴 것인가? 다행히 어머니가 그토록 좋아하는 바다가, 반짝이는 물결을 일으키며 나지막이 속삭인다. ‘제주해녀로서 60년 동안 목숨 걸고 물질하며 2남7녀를 키워냈으니, 그 삶이 지극히 장하고 귀하다!’라고. 가을빛이 파도를 타고서 산산이 부서지며 청려장을 어루만진다. 어머니의 얼굴도 눈이 부시게 빛난다. 밀감이 익어가는 귤림추색(橘林秋色)의 계절에, 부디 제주의 백세 어르신들이 행복하시길 빌어본다.

이번 주는 ‘제주도 노인의 행복도 조사’를 위해 제주시의 노인대학 학생들에게 ‘장수의 비결’을 특강했다. ‘2200년 전 진시황이 서복을 파견해 불로초를 구한 곳이 한라산이니, 제주도에 산다는 것 자체가 장수의 비결’이라고. 모두가 손뼉을 치며 환호하는 가운데, 노년의 행복이 배움으로 꽃핀다. 2022년 말 현재, 제주도는 65세 이상 노인 인구 중 85세 이상 초고령 인구 비율이 12.6%로, '장수도'가 17개 시·도 중 4번째다. 신화와 역사를 통해 ‘장수의 섬’으로 알려진 제주도가, 국가의 장수문화를 선도하면 좋으리라. 내년부터는 99세가 되는 예비 백세 인들께, 한라산의 명아주 지팡이를 선사하면 어떨까. 한 평생을 허리 휘는 농사일로 검불이 되어버린 부모님이, 청려장에 의지해 장수의 복을 누리시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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