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무사 죽어수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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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 시인

1949년 1월 17일 제주 주둔 제2연대는 북촌 주민들을 초등학교 마당에 집결시켰다. 군경 가족을 제외한 주민들을 인근 옴팡밭과 당팟으로 끌고 가 학살했다. 날이 어두워 사격중지 명령으로 살아난 사람들은 다음날 함덕대대로 출석할 것을 명령받았다. 그 뒷날 함덕대대로 출석한 주민들은 전원 학살됐다.

당시 청년 김한홍은 함덕대대로 출석하지 않고 산으로 피했다. 내려오면 살려준다는 소문에 자수했지만 동부두에 있는 주정공장(동척회사)에 갇히고 말았다. 이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끝내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던 김한홍이 74년 만에 돌아왔다. 백골이 돼 돌아온 것이다.

고향에 돌아온 고인을 맞이한 것은 고인의 아들 김문추가 아니었다. 80세 넘은 며느리와 손녀, 손자였다. 살아생전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며느리는 “남편(고 김문추)이 그렇게 아버님을 찾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찾지 못했는데 여러분들께서 이렇게 아버님을 찾아 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감사의 말을 전했다.

며느리는 “제주4·3을 생각하면 눈물 밖에 나지 않습니다. 남편이 이 모습을 못 보고 세상을 떠난 것이 억울하고 억울해서 더 이상 말을 못 하겠습니다” 라며 울먹였다.

김한홍 청년은 1948년 10월 포고령에 이은 계엄령으로 설치된 군법회의에서 1949년 7월 4일 7년형을 선고 받아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다. 1950년 7월 3일부터 5일까지 3일에 걸쳐 여순사건 관련 재소자 등과 함께 대전시 산내면 골령골에서 총살 후 암매장됐다. 이 사실은 당시 미 대사관의 Bob E edwards 육군 중령이 본국에 보고한 기록에서 확인된다.(‘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1950년 9월 23일「한국에서의 정치범 처형자 보고」240p)

고인의 유해는 지난 2021년 대전 골령골 1학살 A구역에서 발견됐다.

74년 만에 고향 제주 북촌마을로 돌아온 고 김한홍 청년을 제주특별자치도와 제주4·3평화재단은 지난 10월 5일 고인의 고향 제주시 조천읍 북촌포구 일원에서 봉환식을 거행했다. 오영훈 지사와 고인의 며느리인 백여옥, 손자 김준수 손녀 김효정, 4·3유족회장 김창범, 송재호 국회의원, 현길호 도의원 등 200여 명이 참석해 명복을 빌었다.

무지막지한 군인들을 피해 산으로 갔던 스물여섯의 청년 김한흥은 유해로 돌아왔다. 내려오면 살려준다는 말을 듣고 내려왔는데 형무소에 갇혔다. 대전 골령골에서 총살당하고 74년 만에야 고향으로 돌아왔다. 자수했는데 왜 주정공장에 갇혔고, 왜 군법회의에 넘겨진 것인지, 어떻게 한날 한시에 군법회의에서 7년 형을 75명이나 똑같이 언도받았는지, 7년 징역형인데 왜 총살당했는지, 누구도 말해주지 않는다. 어디에서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는 골령골 학살터에서 유해는 돌아와 격식 갖춘 봉환식을 치렀지만 고 김한홍 청년은 우리에게 이렇게 물을 것만 같다.

“나, 무사 죽어수과?”

 

 

※ 본란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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