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11월을 아끼고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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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창구, 시인·수필가·前애월문학회장

바람이 불 때마다 낙엽 구르는 소리가 왁자하게 들린다. 바람 소리인지, 낙엽 구르는 소리인지, 판단이 서지 않는 11월이다. 창 밖 바람소리에 귀가 예민해지는 계절이기도 하다. 11월은 가을이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겨울도 아니다. 늦가을과 초겨울이 만나는 그 언저리 어디쯤이다. 달력 속에는 입동(立冬)과 소설(小雪)이 들어있지만 절기(節氣)에 지나지 않는다.

11월은 이미 흘러가 버린 일에 대해 후회하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나갔음을 알게 하고, 새로운 미래를 설계하기에는 아직 한 달이라는 시간이 남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이 조락(凋落)의 계절, 얼마 남지 않은 저금통장의 잔고를 아끼듯이 가을의 끝자락 여유를 아끼고 싶다.

11월이면 귀뚜라미와 풀벌레 소리가 침묵하고, 나뭇잎들이 침묵하며, 사람들도 침묵 속에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목을 움츠리고 어딘가를 향해 종종걸음 치고 있다. 겨울이 성큼 다가서고 있다. 어제까지만 해도 춥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간밤에 비가 한 차례 쓸고 지나더니 오늘 날씨는 제법 쌀쌀하다. 또 한 번의 비가 내리면 가을이 끝날지 모른다. 가을비는 대지(大地)의 땅보다 마음에 먼저 내린다. 11월에는 비가 오다가 눈이 되기도 하고, 눈이 다시 비로 변하는 달이다. 서릿발이 심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외로이 지키는 절개라는 오상고절 국화도, 한 해 동안 아홉 마디로 자라서 마디마디에 아픔을 간직한 하얀 구절초, 보랏빛 쑥부쟁이도 모두 빛을 잃는 계절이기도 하다. 초록이 바래버린 산길 덤불에 망개나무의 빨간 열매들이 마지막 햇빛을 즐기고 있을 때, 새들은 높이 날아 멀리 길을 떠나고 있다.

11월의 가을 소리! 모든 것을 다 내어 준 무욕의 빈 들의 벌판에 앉아 석양이 지는 소리에 귀 기울여 본다. 자연이 들려주는 순명의 소리는 우리에게 겸허를 가르친다. 가진 것 다 놓고 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아름다움만 보여준다. 온전한 정신이 깨어있는 생명의 소리이자 기도와 사랑, 성찰과 참회의 소리이다. 이 세상에 인간이 자신의 소유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누구나 무소유로 왔다가 무소유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데도, 소유의 노예가 돼 상대적 박탈감에 울며 분노하고 있다. 모두 다 부질없는 일이다. 지금 억만금을 쌓아두고 가둠의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재벌들의 어리석은 허상(虛想)이 선량한 이웃의 삶마저 피폐하게 할 뿐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를 아름답고 행복하게 하는 것은 돈과 권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소박하고 소소한 일상에서 최선을 다해 그 성취를 이루었을 때의 그 만족감이다.

11월은 식물들도 씨앗을 털고 여름동안 턱없이 비대해진 줄기 같은 것도 풍장 하듯 바람에 맡긴다. 석양을 등지고 서 있는 하얀 억새의 저 가벼운 몸짓처럼, 구름이 가벼워지고, 그 위를 날아가는 철새들의 깃털이 가벼워지고, 우리의 마음도 가벼워진다. 가을은 질서와 순종의 소리, 비움과 무욕의 소리로 그득하다. 이 가난한 11월을 사랑하자. 신이 우리에게 가을을 준 가장 소중한 것은 겸허함이라 했듯이 가을의 끝자락에서 겸허의 소리, 겸손의 소리, 고마움과 감사의 소리, 나눔과 베풂의 소리로 가득 채워 봄이 어떨까.

 

 

※ 본란 칼럼은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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