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무늬 조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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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주, 수필가

한라산에 첫눈이 오더니 대설경보까지 내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반소매 티셔츠 바람으로 마트며 시장이며 여름인가 하고 다녔는데 급기야 두꺼운 스웨터를 꺼내 입게 한다. 갑자기 추워진 탓인지 오리털 롱코트까지 입은 이들도 보인다.

요양병원에 계시는 시어머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가끔 물리치료실에도 가야 하니 환자복 위에 걸칠 조끼 하나 보내달라고. 이왕이면 꽃이 많이 그려진 화려한 조끼였으면 좋겠단다. 걱정하지 마시라고 대답한 뒤 조끼를 구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평소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분이었는데 갑자기 꽃무늬 조끼라니 심경에 무슨 변화라도 있으신 걸까. 패션업계에서는 무늬를 통해 사람의 감정을 읽는다고 한다. 무늬에 따라 의미가 조금씩 다르겠지만 꽃은 땅에 뿌리를 두고 하늘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삶과 부활의 의미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일 년이라는 병원 생활이 얼마나 갑갑했으면 새로운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을 화려한 꽃무늬 조끼로 대신하셨을까.

동네 의류상가를 돌아다녔다. 하지만 대부분 그런 조끼가 없다는 대답이다. 이번에는 재래시장을 둘러보기로 했다. 재래시장은 만물상 같은 곳이므로 뭐라도 있을 테지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다.

복잡한 시장 입구에 들어서자 온갖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마치 외국 공항에 도착하면 그 나라의 향이 느껴지듯 이곳 시장만의 독특한 냄새가 향으로 다가왔다. 배가 고프지 않아도 입 안에 침이 고이고 물건의 다양함에 눈이 돌아갔다.

수많은 먹거리와 특산물 가득한 시장 골목을 걷다 보니 나도 모르게 구경 삼매경에 빠지고 말았다. ‘아차, 꽃무늬 조끼를 사러 왔었지.’ 하지만 정신 차리고 살펴봐도 꽃무늬 조끼는 볼 수 없었다. 사실 누군가의 선물을 고른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지만 시어머님의 부탁이자 선물이므로 더욱 신경이 쓰였다. 병실의 무거운 분위기를 환하게 밝혀줄 색상은 물론 부드러운 소재와 약간의 디자인까지 고려하다 보니 원하는 조끼와의 근접성이 점점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거의 포기하다시피 하며 돌아서려는데 어느 옷집 벽면에 분홍색 조끼가 눈에 띄었다. 얼른 들어가 주인에게 상황을 설명하자 주인은 벽에 걸린 ‘뽀글이’ 조끼를 꺼내 보인다. “어머님에게는 이게 좋을 것 같네요.” 양털처럼 뽀글뽀글한 모양의 인조 털로 만들어진 것으로 얇지도 두껍지도 않은 분홍색 조끼였다. 다만 꽃이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이 아쉬웠지만 대체로 맘에 들었다. 내 표정을 언제 읽었는지 눈치 빠른 주인은 잽싸게 조끼를 챙겨 내게 건넸다.

시어머니에게 드릴 간식과 조끼를 가지고 병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척 가볍다. 옷은 마음에 들어 하실까. 별로라고 하면 어쩌지. 시어머니의 마음을 점치다 보니 어느새 병원에 도착했다. 간병인에게 물건을 부탁하고 다시 내려오는데 시어머님에게 전화가 왔다. “수고했다. 입어보니 병실에서 다들 예쁘다고 하지 뭐냐.”

다행이다. 올겨울엔 어머님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치유돼 꽃처럼 환한 삶을 사셨으면 좋겠다.

 

 

※ 본란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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