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오와 그리움은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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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이안 수필가

“증오는 그리움과 비슷해요.”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학교폭력에 시달린 여주인공 동은이 한 말이다. 증오와 그리움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증오는 미움이, 그리움은 사랑이 남아 뿌리를 내린다. 그 뿌리는 깊고 길어서 쉽게 뽑히지 않는다. 힘도 세서 위로 자란 줄기와 잎, 꽃과 열매까지 좌우한다. 증오의 뿌리를 가진 동은의 삶은 모든 것이 복수에 초점이 맞춰졌다. 성인이 되어 직업을 선택할 때도 복수를 염두에 두었다. 집요하고 치밀하게 계획된 복수는 결국 끝을 보았다.

시인이자 정치인이었던 단테는 증오와 그리움, 두 가지에 시달렸다. 그는 피렌체 공화정의 고위직에 있었으나 모함을 받아 재산 몰수와 사형을 선고받았다. 동료들의 배신으로 이후부터 그는 죽을 때까지 망명 생활을 했다. 그리움의 원천은 9살에 만난 베아트리체였다. 첫 만남에서 그녀에 대한 연모의 그물에 사로잡혔고, 9년 후 거리에서 우연히 한 번 더 보았을 뿐이다. 베아트리체가 24세에 세상을 떠난 후, 단테는 영원한 포로가 되었다.

단테는 12년 동안 증오와 그리움을 원동력 삼아 『신곡』을 썼다. 지옥편에서 그는 친구를 배신한 자를 맨 아래 지옥에 배치했다. 이곳엔 그리스도 예수를 고발한 유다와 카이사르 황제를 저버린 브루투스가 속해 있다. 그는 이단자나 폭력배보다 배신자가 가장 중한 죄를 지은 것으로 보았다. 베아트리체는 천국에서 자신을 안내하는 역할이다. 단테가 생전에 그녀와 결혼했더라면 그 역할을 주지 않았을 것 같다. 작품을 쓰고 일 년 뒤 그는 생을 마감했다.

조각가 카미유 클로델도 그리움과 증오로 고통받았다. 그녀는 19세에 43세의 로댕을 스승으로 만나 사랑에 빠졌다. 이미 로즈라는 여인과 동거하며 아들까지 있던 로댕의 바람기는 멈춘 적이 없었다. 카미유가 24세에 조각가로서 우뚝 서자 로댕은 그녀를 견제했다. 사이가 벌어져 15년의 사랑이 끝난 후, 카미유는 로댕의 연인 이미지가 강해 예술가로 인정받기 어려웠다. 좌절한 그녀는 자신의 작품을 파괴했고, 우울증과 정신착란에 시달렸다. 로댕에 대한 그리움이 증오로 변하자 뿌리째 삶이 흔들렸다.

로댕은 죽음을 앞둔 77세에 그때까지 충실히 곁을 지킨 로즈와 결혼했다. 로즈는 50년 넘게 기다린 보람이 있다며 기뻐했을까, 아니면 그동안 쌓인 분노가 새삼 끓어올랐을까. 그녀가 결혼하고 이 주 만에 죽은 것을 보면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던 것 같다. 로댕은 자신의 편의대로 여자를 활용했다. 주위 여자들이 자신 때문에 겪는 지옥 같은 감정은 알 바 아니었다. 증오나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자신이 그런 감정을 심어준 것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뿌리는 지하에서 남몰래 자라는 법이다.

동은에게는 증오라는 한가지 뿌리가, 단테에게는 증오와 그리움의 두 뿌리가, 카미유에게는 그리움이 증오로 변한 뿌리가 박혀 있었다. 증오도 그리움도 고통이다. 즐거움은 가벼워서 날아가지만, 괴로움은 무거워서 가라앉는다. 하지만 그 무거운 뿌리에서 꽃과 열매가 나온다. 복수를 마친 동은은 앞으로 화사한 꽃을 피울 수 있을까. 단테는 명작이라는 열매를 낳았다. 카미유도 조각을 계속했다면 스스로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넘치는 눈물은 뿌리를 썩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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