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내선일체(內鮮一體) 허구성을 날카롭게 비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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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4) 독립운동가 현사선

현사선, 재일교포 사업가…건국유공 대통령 표창 전수
현상호, 오사카서 항일 활동…제주해녀투쟁 논문 발표
현상휴, 제주군공립소학교 부교원…귤림서원 복원 주장
현승규, 제주향교 직원(直員)…제주향교 대수선 사업 수창

▲현사선玄詞善:1911(일제강점기)~2001, 조천 소비조합의 항일 활동. 재일교포 사업가. 본관은 연주, 조천읍 함덕리에서 현천학(玄千鶴)의 아들로 태어났다. 구명은 현사선(玄巳善). 

현사선은 향리의 개량서당 영명의숙(永明義塾)에서 2년을 수학하고 나서 양말 제조업, 양잠업과 채소 재배업 등을 아내 강희경(康熙璟)과 함께 영위했다. 

본시 민족 계몽운동에 뜻을 두어 제주 청년동맹 함덕지부의 맹원으로 활동했다. 동 지부 주최로 소인극(素人劇) 공연을 통해 일제하의 세태를 풍자하는 활동을 펼쳤다. 

설날인 1930년 2월 17일에 함덕 청맹원 4명이 제주면 화북리에 가서 ‘아리랑’, ‘농촌의 설움’등의 제목으로 연극을 공연했다. 이 일로 함덕리의 청맹원 한윤섭, 김명훈, 김일준, 현사선 등이 구속된 바 있었다. 

청맹 함덕지부도 조천지부와 마찬가지로 소녀야학을 실시해 청소년들에게 민족사상을 쉽게 가르쳤다. 또 함덕(咸德)청맹원들은 일본에서 죽어 귀향한 유해가 돌아오자 청맹원 ‘동지장(同志葬)’으로 거행, 이 기회에 항일 의지를 다지기도 했다. 

현사선은 조천리로 생활 근거지를 옮겨 상점을 차려 1935년 1월부터 3년간에 걸쳐 신좌(新左)소비조합 상무이사를 역임했다. 1940년 3월 ‘내선일체(內鮮一體)’의 허구성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말을 했고 동년 4월 하순경에는 한인 지원병제의 부당함을 성토했다. 이 일로 조천소비조합의 항일 활동이라고 하여 일행은 1941년 9월 중순에 일경에 체포돼 1942년 8월 13일 광주지방법원에서 김시용(金時容)은 금고 1년 형을, 안세훈(安世勳)(일명 堯儉), 김유환(金瑬煥), 현사선(玄詞善), 김평원(金平遠) 등은 각각 징역 6월에 처해졌다. 

정부에서는 늦게나마 1993년 광복절에 주일대사 공노명(孔魯明)에 의해 건국유공 대통령 표창을 전수했다.
 
▲현상호玄尙好:1914(일제강점기)~1971, 일본 오사카에서 항일 활동. 가명 김정국(金定國). 본관은 연주, 현규평(玄奎平)의 아들로 구좌읍 하도리<별방>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노농구원회(勞農救援會) 오사카지부에 참여, 1933년 3월 검거됐다. 1933년 12월 20일 ‘나라’(奈良)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년 2월형을 선고받았다. 1971년 8월 22일 오사카 생야구(生野區)에서 사망했다. 동년 11월 13일 오사카공소원에서 징역 2년이 선고돼 옥고를 치렀다. 1945년 광복 직후 재일 조선인연맹(在日朝鮮人聯盟) 오사카지부의 외무부장으로 활약했다. 1950년 조련(朝聯)의 대변지 해방신보의 사장에 취임, 논조가 과격해서 일제로부터 동년 8월 2일 발행 금지처분을 당했다. 

1934년 3월에는 적기(赤旗) 독자그룹을 조직하여 그 회원을 확대한 바도 있었다. 오사카에서 주물공으로 있으면서 항일활동을 하던 중 1936년 검거됐다. 한국에서의 노농구원회를 일본에서는 일본 적생구원회 혹은 약칭으로 ‘적구(赤救)’라고 했다. 1930년 11월 이후의 재일 한인의 좌익화 조직을 적극화 했다. 그는 1933년 같은 고향의 동지 정문봉(鄭文奉)을 입회시켜 함께 활동했으나 이 조직은 1934년을 끝으로 소멸됐다. 

그는 일본 노동조합 전국협의회 토건노조 오사카지부 성남(城南)지구분회, 나라(奈良)현 대화천(大和川)분회 조직지도자로 활동했다. 이때 나라현 북갈성군(北葛城郡) 왕사정(王寺町) 월산반장(月山飯場)에서 살았다. 

그는 1957년 일본 동경 조선연구소에서 발행한 ‘조선월보(제10호)’에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한 제주도의 해녀투쟁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목차는 다음과 같다. 해녀투쟁의 원인과 성산포 사건, 해녀투쟁의 발달과 경과, 일본 제국주의의 폭압과 싸운 해녀들(이하 다음 호), 제주도의 조직의 희생과 해녀투쟁의 결말, 해녀투쟁의 성과와 결함 등이다. 조선연구소는 조총련(의장 한덕수)에 의해 비판적인 ‘종파의 소굴’이라 하여 조선문제연구소(당시 소장 한덕수)에 흡수됐다. 그 후에 현상호의 논문의 후반 부분이 없어졌다.

▲현상휴玄商休:1862(철종13)~1905(광무9), 한말 학부의 교원. 자 명녀(命汝). 호 거은(巨隱), 본관 연주, 제주시 화북동<별도> ‘거로-마을’에서 태어났다. 현상휴는 경신재에서 고경준에게 한문을 수학하던 젊은 때부터 세계정세에 통찰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1902년 5월 13일 제주군공립소학교 부교원(副敎員)으로 부임했다. 

귤림서원의 복원 문제를 늘 제기했다. 경학에 밝아 글을 잘 해서 사종(師宗)이라고 칭해졌다. 이에 앞서 제주향교의 장의(掌議)로 재임할 때 오현단에 향현사(鄕賢祠) 유허비 건립을 주창, 1893년(고종30)에 유허비(遺墟碑)를 세우게 돼 표제의 글씨는 현상휴가 쓰고 비문은 영운(靈雲) 고경준(高景晙)이 짓고 비문 글씨는 동곡(東谷) 이기용(李基瑢)이 썼다. 비문을 건립하는 데는 경신재(敬信齋)의 접장 이기항(李基恒)과 유사(有司) 김봉하(金奉河)의 노력이 컸다.

▲현승규玄升圭:1870(고종7)~1941, 제주 유림의 반수(班首). 제주향교 직원(直員). 초명은 현승림(玄升琳). 자는 공유(貢惟), 호는 월계(月溪). 본관은 연주, 제주시 노형동, <름> 월랑촌에서 태어났으며 해방 후 제주중학교 초대 교장 현경호의 아버지다. 처음은 영운(靈雲) 고경준(高景晙)에게 글을 배우고 나중에는 도은(桃隱) 김일해(金日海)에게 수학했다. 1918년 유림을 움직여 제주향교 대수선 사업을 수창해 이를 완성했다. 

천성이 어질고 효우(孝友)를 겸비하며 경전(經典)에도 밝아 사림에서 존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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