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읍, 음미하면 아름다움·삶의 청량감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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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 목민관 임형수와 풍류남아 임제가 찾아온 성읍마을

‘한국인 꼭 가봐야 할 관광지’ 선정
전설 유래, 영주산 옛 이름 ‘영루’

한라산서 발원한 천미천, 가장 길어
풍류객 유혹하는 풍광…‘정소암’

▲정의현청이 들어선 빼어난 명당자리


1984년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성읍마을은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에 의해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관광지 100곳’에 선정되기도 했다. 


제주의 3읍성(제주목·정의현·대정현) 중 해발 120m 높은 지대에 자리 잡은 성읍마을이 정의현의 도읍지가 된 까닭은 이곳의 독특한 입지 조건에서 찾을 수 있다. 


풍수지리에 문외한인 사람이라도 성읍마을을 감싸고 있는 영주산(326m)에 올라가면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백 가지 약초가 자란다는 백약이 오름 인근에 있는 영주산의 옛 이름은 ‘영(靈)루’이다. 영루는 신선들이 살았다는 전설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영주산에 올라 동서남북을 둘러보면 동쪽으로는 나지막한 오름이 이어지다가 멀리 일출봉과 우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서쪽으로는 넉넉한 한라산 자락에 모지오름∙장자오름·새끼오름·따라비오름이 자리를 잡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남산봉이 찾아오는 손님을 대하듯 공손한 자세로 서 있고, 달산봉은 바다에서 들어오는 병화(兵禍)를 막아주듯 당당하다. 북쪽에는 개오름·백약이오름·좌보미오름이 병풍을 치듯 영주산을 호위하고 있다. 


이러한 풍수지리적 여건을 지닌 성읍마을을 두고 고 김영돈 교수(제주대)는 ‘전란이 일지 않는 이른바 병화불입지지(兵火不入之地)’라고 칭하기도 했다. 


▲천미천과 더불어 살아온 성읍 사람들


한라산에서 발원한 천미천은 도내에서 가장 긴 하천으로, 비가 많이 내릴 때만 흐르는 건천이다. 


천미천이 감싸 도는 성읍마을은 한라산을 조산(祖山: 진혈의 중심 산)으로, 영주산을 진산(鎭山: 고을의 중심 산)으로, 남산봉(178m)을 안산(案山: 마주 대하는 가까운 산)으로 삼을 수 있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좌청룡(靑龍)·우백호(白虎)·남주작(朱雀)·북현무(玄武)의 형태로 산이 배치되고, 물의 원천인 천미천이 마을의 왼쪽을 돌아 나가는 성읍마을은 실로 명당의 여러 조건을 충족하고 있는 듯하다. 


이곳 선인들은 마을이 마치 사람과 물자를 가득 실은 배 모습과 같다고 말하곤 했다. 마을 안산인 남산봉이 닻이고, 천년 수령의 느티나무가 돛대 구실을 한다 했다. 그래서 물이 배 안으로 새어들지 못하게 마을 안에는 우물을 일체 파지 않았다. 


대신 성읍을 지나 성산읍 하천리 바닷가로 흐르는 천미천 곳곳의 암반 지대에는 늘 물이 고여 있어, 가물 때도 마을 사람들은 물 걱정 없이 그럭저럭 견뎌 나갈 수 있었다.


여기서 식수를 얻고 소와 말에게 물을 먹이고, 종일 밭에서 일하다 지친 몸을 씻기도 했다. 

신선들이 놀고 갔다는 전설이 남아 있는 정소암의 전경.
신선들이 놀고 갔다는 전설이 남아 있는 정소암의 전경.

특히 난대성 수풀이 우거진 정소암이라는 연못 주변은, 신선들이 놀고 갔다는 전설이 사실인 양 풍류객들을 유혹하는 멋진 풍광을 여전히 자랑하는 곳이다. 


진달래꽃이 만발한 삼짇날(음력 3월 3일)에는 현감과 관리, 그리고 기생과 백성들이 이곳에서 한마음으로 어울리며 ‘화전놀이’를 하며 즐겼다 한다. 


▲저절로 시심에 젖게 하는 성읍마을


성읍마을에는 오래된 유적과 유물에 더해 마을 저변에 도도히 흐르는, 개성이 넘치는 마을 특유의 운치가 있다. 


돌하르방의 넉넉한 미소를 마주하고 돌담과 초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를 들으면서 천년 느티나무와 팽나무 거리를 거닐다 보면 누구나 시심에 취하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성읍을 스쳐 간 역사적 인물들이 남긴 시들이 여럿 전해진다. 재직 시 훌륭한 행정을 펼쳤지만, 1547년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돼 죽임을 당한 임형수(1514~1547) 목사의 시판(詩板)이 정의현성 객사에 걸려있었다. 다음은 시판의 내용이다. 

 

 

‘해가 지니 까마귀들 숲으로 찾아들고 천기 차갑고 바닷가 수루는 공허하네(有日落林鴉定 天寒海戍空之句)’ 

 


이 시판을 보고 감격한 조선의 천재시인 백호 임제(1549~1587)는 정의현 객사에서 하룻밤을 유숙하며 다음의 화답시를 남겼다. 

 

 

“안타까워라 임형수 절제사여(吾憐林節制)/ 의로운 기백은 해동 하늘에 가득한데(義氣滿天東)/ 상공보다 세상에 늦게 태어났기에(生世嗟相後)/ 맑은 술 함께 못 해 한스럽소(淸尊恨末同)/ 님의 아름다운 혼백은 어디에 계시는지(英魂落何處)/ 너른 바다만 아득한 창공에 이어지네(滄海沓連空)/ 아름다운 시구 남겨 감격하나니(感激留佳句)/ 이 밤 홀로 객사에서 읊조리네(孤吟夜政中)”

 


『남사록』을 남긴 김상헌(1570~1652)도 정의현 객사에 머물면서 ‘정의객사차판상운’(旌義客舍次板上韻)이라는 글을 남겼고, 조선 후기 대둔사(현 대흥사)의 승려 범해 각안(梵海 覺岸)(1820~1896)도 ‘정의현 동헌의 시운을 잇다’(次旌義東軒韻)라는 시를 남겼다. 


어디 이뿐이랴. 정의현 북쪽에 있던 의두정(倚斗亭)이란 정자에서도 현감과 고을 유생들은 풍류를 즐기곤 했다. 그들에 의해 전해오는 ‘정의팔경(旌義八景)’에는 영주산에 떠가는 구름(瀛州行雲), 비가 온 뒤의 녹남도 폭포(北嶺觀川), 정소암 화전놀이(鼎沼春花), 천미천의 범람(路川氾濫) 등이 있다. 


최근에는 정의팔경에 ‘유적경관(遺跡景觀)’을 새롭게 넣고 있다. 유적경관이란 여유롭게 여기저기를 다니며 음미하다 보면 성읍마을의 아름다움과 함께 삶의 청량감도 느낄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렇듯 저절로 시심에 젖게 되는 마을이 성읍의 어제와 오늘의 모습이리라.     


글·사진=강문석 (사)질토래비 전문위원·성읍별곡사진갤러리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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