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흐에 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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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자, 수필가

초겨울이다. 바다의 갯내가 칼칼한 바람을 타고 코끝으로 스며든다. 아슥하게 물드는 저녁놀이 파도와 함께 출렁인다. 간간이 떠 있는 고깃배의 집어등이 하나 둘 켜지며 어두운 바다를 밝힌다. 거친 바람에도 바다는 쉬지 않고 밀려왔다 밀려가며 물꽃을 피워낸다.

물꽃이 피고 지는 동안 한 해가 햇덧처럼 지나간다. 달력을 넘길 때마다 빼곡히 적혀있는 일정들에 숨이 막힌다. 바쁘게 걸어 온 것 같지만, 많은 날을 무엇으로 채웠는지 가슴이 허허롭다. 손으로 움켜쥔 모래가 소리 없이 빠져나가듯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사방으로 흩어져 사라져버린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다. 하지만 시간이 주는 의미는 각자 다르다. 멈추지 않고 흐르는 시간을 붙잡아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은 나의 몫이며 능력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행복보다는 보이지 않는 행복을 좇으며 많은 시간을 보낸다. 흩어진 모래가 조금씩 쌓여 다시 모래 사장을 이루듯,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잘 보내다 보면 오지 않을 것 같던 날들을 맞이한다.

딸아이가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렀다. 지금까지 달려온 시간을 ‘수능’이라는 이름으로 평가를 받는다. 수능을 준비하며 쌓은 시간 속에 얼마나 많은 사연이 녹아 있을까. 밤잠을 설치며 무거운 책가방을 메고 걸어오는 아이의 발자국에서 지치고 힘든 수험생의 무게를 느낀다. 앞만 보고 쉼 없이 달려온 시간, 시험장에 앉아 애면글면하는 모습을 생각하며 조용히 두 손을 모은다.

시험을 끝내고 나오는 딸아이의 얼굴이 비가 오다 잠시 갠 하늘처럼 맑다. 긴장하던 가슴을 쓸어내리며 살포시 안아 준다. 결과에 연연하지 말자고 위로하는데 딸아이가 한마디 한다. “엄마, 그동안 수고했어요. 그리고 제일 고마운 건 공부하라고 재촉하는 말 대신 쉬엄쉬엄할 수 있는 만큼만 하라며 부담을 주지 않는 말 한마디가 너무 좋았어요.” 코끝이 찡했다. 해준 것이 없어 늘 미안한 마음이었는데 아이는 의외의 답을 주며 고맙다고 한다.

아이의 말에서 느껴지는 느긋함이 좋다. 여유로움 속에 행복이 있음을 아는 듯 해맑게 웃는다. 정신없이 지나온 날들에 잠시 쉼표를 넣을 시간, 그동안 부족한 잠을 자겠다며 담숙한 이불속으로 파고든다. 아이가 곤히 자는 모습에서 너흐를 읽는다. 나비가 나풋나풋 날아오듯 아이의 숨소리는 멀리서 시작된 파도를 타고 잔잔히 밀려온다.

방파제에 앉아 물끄러미 바다를 바라본다. 밀물에 가득 찼던 바닷물이 썰물에 서서히 바닥을 드러낸다. 바닷물은 흘러가고 없지만, 그 자리는 여실히 남아있다. 우리의 시간도 무심한 듯 흐르지만, 누군가의 추억 속에 존재한다.

물에 잠겼던 모래가 물기를 머금은 채 젖어있다. 바다는 마르고 젖으며 그저 묵묵히 자연에 순응한다. 유유히 흐르는 바다처럼 너흐를 가질 때 비로소 눈앞의 보이지 않던 대상에서 특별한 빛을 볼 수 있지 않을까.

바닷물이 다시 서서히 차오른다.

 

 

※ 본란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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